봄바람, 은여우 (외 2편)
이은봉
봄바람은 은여우다 부르지 않아도 저 스스로 달려와 산언덕 위 폴짝폴짝 뛰어다닌다
은여우의 뒷덜미를 바라보고 있으면 두 다리 자꾸 후들거린다
온몸에서 살비듬 떨어져 내린다
햇볕 환하고 겉옷 가벼워질수록 산언덕 위 더욱 까불대는 은여우
손가락 꼽아 기다리지 않아도 그녀는 온다
때가 되면 온몸을 흔들며 산언덕 가득 진달래꽃 더미, 벚꽃 더미 피워 올린다
너무 오래 꽃 더미에 취해 있으면 안 된다
발톱을 세워 가슴 한쪽 칵, 할퀴어대며 꼬라지를 부리는 은여우
그녀는 질투심 많은 새침데기 소녀다
짓이 나면 솜털처럼 따스하다가도 골이 나면 쇠갈퀴처럼 차가워진다
차가워질수록 더욱 재주를 부리는 은여우, 그녀는 발톱을 숨기고 달려오는 황사바람이다.
허공
세상은 벌써 눈 덮인
겨울 산, 겨울 하늘
눈 감으면 마음의 허공 한가운데로
어린 꾀꼬리 한 마리
파릇파릇 솟구쳐 오른다
길게 대각선을 그으며,
바람의 파수꾼
무엇으로, 왜, 어떻게 바람을 지키겠다는 것인가
손오공처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바람을 지키겠다는 것인가
이마에 손을 올리고 저기 아득한 허공을 주욱 둘러보고는
불어오는 바람을 꼼짝 못하게 잡아 묶어 감옥에 처박아 두겠다는 것인가
킥킥킥, 새들이 웃는다 새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실은 새들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당신 아닌가
바람보다 먼저 새들이나 지켜보시지
새들보다 먼저 구름이나 지켜보시지
새들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구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왜, 무엇으로 바람을 지키겠다는 것인가
도대체 무슨 근거로, 무슨 이유로
당신은 바람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바람은 사람, 사람은 마음, 마음은 자유……, 자유가 발길을 만들고, 발길이 역사를 만들지
바람을 지키겠다는 것은 역사를 지키겠다는 것
무엇으로, 왜, 어떻게 역사를 바람을 지키겠다는 것인가
바람은 흐르는 것, 바람은 달리는 것
그렇지 물처럼 여기저기 스미는 것
아직도 당신은 구름을 타고 있는가
당신이 타고 있는 구름은 뜬구름
손오공의 흉내 그만두고 얼른 땅으로 내려오시게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미루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머리칼을 날려 보시게
그것이 실은 바람을 지키는 일
더는 바람을 지키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네
바람이 지금 당신의 여린 잎새들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잖나
—시집『봄바람, 은여우』(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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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 1953년 충남 공주(현, 세종시) 출생.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 1983년 《삶의문학》 제5호에 「시와 상실의식 혹은 근대화」를 발표하며 평론가로, 1984년 《창작과비평》의 신작 시집 『마침내 시인이여』에 「좋은 세상」외 6편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활동. 시집 『좋은 세상』『봄 여름 가을 겨울』『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무엇이 너를 키우니』『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길은 당나귀를 타고』『책바위』『첫눈 아침』『걸레옷을 입은 구름』『봄바람, 은여우』, 평론집『실사구시의 시학』외. 현재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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