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옥의 방 한 칸 (외 1편)
이윤학
화단을 지키는 고양이 밥그릇에다
성견 사료 한 알 한 알 떨어뜨려줬더니
골이 났는지 눈길도 주지 않더라
마름모꼴 방 끝의 티브이를 켰더니
화면 중심으로 불 꺼진 성냥골이
쏜살같이 떨어지더라
모자를 쓰지 않았는데
모자를 쓴 것 같은 느낌이
찾아올 때가 있더라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어떤 사랑도 실패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더라
정체불명의 내가 전전 주인이
하숙을 치던 식탁의자에 앉아 있더라
들린 벽지에서 흙가루 떨어지는 소리
불룩한 배를 끌어안고 있더라
치킨집 개업 기념 벽시계 초침
좁아터진 방 한 칸 갉아먹는 데
이십몇 년이 걸린다더라
나무대문을 발로 걷어차면서
자기 이름을 불러대는 목소리
새벽 눈발이 들이치더라
비문을 옮기는 포클레인의 후미
갈림길이 하나로 통합될 때
너는 혼자가 되어도 좋았다
연잎에 흩어진 물방울
연꽃잎이 감싸 안은 허공을 보았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잠자리가 물의 표면을 찍었고
나이테가 퍼졌다
마디 많은 풀들이
연못에 풀밭을 펼쳤다
죽은 개가 떠올라
불어 터진 옆구리를 드러내고
희멀건 눈으로
연못의 깊이와
하늘의 높이를 가늠했다
비탈진 공동묘지가 내려와
바닥에 석물을 내려놓고
억새를 심어놓았다
방금 전에 수장시킨 핸드폰
물방울을 피워 올리고
화물열차가 기적을 울렸다
오래된 봉분들이 일그러졌다
새로 생긴 봉분이 연못의 태양을 묻었다
너는 어금니로 풍선껌을 몰아 씹었다
나는 벌레들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시집『짙은 백야』(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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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학 / 1965년 충남 홍성 출생. 1990년《한국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먼지의 집』『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그림자를 마신다』『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나를 울렸다』『짙은 백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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