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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문현미 시집 『깊고 푸른 섬』- 깊고 푸른 섬 외 1편

문근영 2018. 12. 20. 02:35

깊고 푸른 섬 (외 1편)

 

  문현미

 

 

 

한 순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거나

사랑이라는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뇌관을

수직으로 전율하게 하는 것이 있다

 

뜨거운 내면의 힘으로

꾸욱 눌러 쓰는 손의 근육으로

하얀 묵음의 바다에서 무채색 노를 저어

 

그 섬으로 간다

그 섬으로 간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아무도 찾지 못하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가시투성이 슬픔과 애써 감춘 아픔과

배신의 등 뒤에서 머뭇거리던 분노와

분홍 나팔꽃의 추억을 녹이고 걸러

한 땀, 한 땀씩

 

애벌레가 품은 꿈의 날개가 연필심에 닿으면

가만, 가만히 먹빛으로 꿈틀거리다가

기어이 한 마리 흑룡으로 날아오른다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새 하늘이 보인다

깊고 푸른 그곳, 그 섬으로 간다

 

 

 

바람이 불고 있다

 

 

 

빗방울을 수직으로 받는 총부리에

쓸쓸한 고요가 노숙하고 있다

 

정물 같은 경계병의 수척한 눈동자에

고이는 익숙한 불안의 냄새

 

오랜 시간 되풀이해 온

습관의 배후가 몹시 궁금하다

 

한 걸음도 더는 나아갈 수 없다면?

 

부재가 농울치는 도라산역 출경구 앞에서

누구도 겨냥하지 않는 총을 들고

이쪽 저쪽의 탄알을 계속 장전하고

 

비릿한 쇳내가 스멀스멀 배어나는

철책선 가까이에 가까스로 다다른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낯선 민간인

 

아무리 꾸욱 눌러 써도 터지지 않는

낡은 탄피 같은 자음과 모음으로

비무장의 시를 바람결에 작두 타듯이 갈기며

 

내용도 없이 형식도 없이

자꾸만 비틀, 비틀거리며

 

 

                      —시집『깊고 푸른 섬』(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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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미 / 1957년 부산 출생. 부산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졸업. 독일 아헨대학교 문학박사. 1998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기다림은 얼굴이 없다』『칼 또는 꽃』『수직으로 내리는 비는 둥글다』『가산리 희망발전소로 오세요』『그날이 멀지 않다』. 현재 백석대학교 국문과 교수.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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