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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강경호 시집 『잘못 든 새가 길을 낸다』- 잘못 든 새가 길을 낸다 외 1편

문근영 2018. 12. 20. 02:34

잘못 든 새가 길을 낸다 (외 1편)

 

   강경호

 

 

 

한 줄의 시도 못 쓰고 있을 때

길을 잘못 든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 한 마리 날아들었다

놀란 새는 내 관념의 이마를 쪼다가

출구를 찾으려 발버둥 쳤다

책에 부딪혀 깃이 빠지고 상처를 입은

새를 바라보는 동안 고통스러웠다

새는, 이 따위 답답한 서재에서는 못 살아 하며

푸른 하늘과 숲을 그리워하면서도 쉽게 나가지 못했다

두렵고 궁금하고 불량하고 불온하고 전투적인

피투성이가 된 새를 바라보는 동안

나도 피투성이가 되었다

새가 소설집에 부딪치고, 시집에 부딪치고

진화론에 부딪치고, 창조론에 부딪치는 동안

산탄처럼 무수히 많은 새끼를 낳았다

새는 겨우 출구를 찾아 날아가 버렸지만

새가 낳은 수많은 새끼들

내 마음의 서재에 살게 되었다

또다시 잘못 든 새가 그립다

 

 

 

허물

 

 

 

햇볕 속에서

허물을 벗는 뱀을 본 적 있다

아주 천천히 제 살을 찢을 때

두꺼비 한 마리 나타나

뱀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늘 아래에서

허물을 벗는 매미를 본 적이 있다

맞지 않은 옷 벗고 젖은 날개를 말릴 때

사마귀 한 마리 나타나

매미의 목을 물었다

 

허물을 벗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들,

가짜를 버리고 진짜를 만나기 위해

제 일생을 내놓기도 하지만,

사람은 허물을 벗지 못한다.

 

더러운 피 씻기 위해 날마다 비누칠을 하지만

가짜를 벗겨내지 못하고

나무들이 허물을 벗고 온몸으로 겨울바람에 맞설 때

사람은 두꺼운 탐욕의 옷을 입는다.

 

 

            —시집『잘못 든 새가 길을 낸다』(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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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호 / 1958년 전남 함평 출생.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언제나 그리운 메아리』『알타미라동굴에 벽화를 그리는 사람』『함부로 성호를 긋다』『휘파람을 부는 개』『잘못 든 새가 길을 낸다』. 연구서 『최석두 시 연구』. 문학평론집『휴머니즘 구현의 미학』. 미술평론집『영혼과 형식』『미술과 문학의 만남』등. 현재《시와 사람》발행인 겸 주간.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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