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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탁번 시집 『시집보내다』 - 문학동네-시집보내다

문근영 2018. 12. 20. 02:33

시집보내다  

오탁번 
 
  
새 시집을 내고 나면
시집 발송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속표지에 아무개 님 청람(淸覽), 혜존(惠存), 소납(笑納)
반듯하게 쓰고 서명을 한다
주소와 우편번호 일일이 찾아 쓰고
튼튼하게 테이프로 봉해서
길 건너 우체국까지
내 영혼을 안고 간다
시집 한 권 정가 8000원,
우표값 840원, ×200권, 300권……
외로운 내 영혼을 떠나보낸다 
 
십 년 전 『벙어리장갑』을 냈을 때
- 벙어리장갑 받았어요
시집 잘 받았다는 메시지가 꽤 왔다
어? 내가 언제
벙어리장갑도 사 줬나?
털실로 짠 벙어리장갑 끼고
옥수수수염빛 입김 호호 불면서
내게로 막 뛰어오는 아가씨와
첫사랑에 빠진 듯 환하게 웃었다 
 
몇 년 전 『손님』을 냈을 때
- 손님 받았어요
시집 받은 이들이
더러더러 메시지를 보냈다
그럴 때면 내 머릿속에
야릇한 서사적 무대가
흐린 외등 불빛에 아련히 떠올랐다
서울역 앞 무허가 여인숙에서
빨간 나일론 양말에 월남치마 입고
맨 허리 살짝 드러낸 아가씨가
팥국수빛 입술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가씨 몇 데리고 몸장사하는
포주가 된 듯 나는 빙긋 웃었다 
 
지지난 해 가을 『우리 동네』를 내고
많은 시인들에게 시집을 발송했는데
시집 받았다는 메시지가
가물에 콩 나듯 왔다
- 우리 동네 받았어요
어? 내가 언제 우리 동네를 몽땅 사줬나?
줄잡아 몇만 평도 넘을 텐데
무슨 돈으로 그 넓은 땅을 다 사줬을까
기획부동산 브로커가 된 듯
나는 괜히 우쭐해지다가도
영혼을 팔아 부동산을 산
못난 졸부의 비애에 젖었다 
 
수백 권 넘게 시집을 발송하다 보면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 통 헷갈려서
보낸 이에게 또 보내고
꼭 보내야 할 이에게는 안 보내기도 한다
- 손현숙 시집 보냈나?
난감해진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박수현 시인이 말참견을 한다
- 선생님이 정말 시집보냈어요?
  그럼 진짜 숨겨 논 딸 맞네요
뒤죽박죽이 된 나는 또 중얼거린다
- 김지헌 시집 보냈나?
- 서석화 시집 보냈나?
- 홍정순 시집 보냈나?
마침내 이 세상 모든 여류시인이
시집을 갔는지 안 갔는지 죄다 아리송해지는
깊은 가을 해거름
내 영혼마저 흐리게 이울고 있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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