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만의 조건들 (외 1편)
유안진
깜부기도 드문드문 도꼬마리 달개비도 섞였네
쥐도 뱀도 개구리 두꺼비도 들락거리네
숨었던가 새들도 날아오르네
꺾이고 쓰러진 보리대궁 사이사이
지나가는 댓바람이, 지나가는 들쥐가, 붙잡는 도꼬마리가
보릿대를 짓밟아, 꺾기도 하고 붙잡아 세우기도 하네
저런 것들이 우연이기만 할까
저렇게 더불어야 보리밭이 되는가
갑자기 먹구름 몰려와 폭우를 쏟아 붓네
보리누름에 비 오면 흉년 든다 들었는데
폭우가 더해져야 더 큰 충만이 되는가
안다는 건 오직 모를 뿐*이네
———
* 숭산선사의 산문집에서
이비인후과
기도실을 나오는 마더 테레사 수녀께 기자가 물었다
뭐라고 기도했나요? 듣지요
말뜻을 겨우 깨달은 기자는 다시 물었다
하느님은 눠라고 하셨나요? 그분도 듣지요
앞말에 이어 목감기인데도 귀부터 본다
나쁜 말은 한 귀로 흘리세요, 담아두면 중이염 돼요
귀를 마음의 창문으로 하면 총명할 총(聰)이고
귀를 따르는 걸(지혜가) 솟구치는 용(聳)이라 했으니
귀를 입보다 앞세우는 왕은 성(聖)자를 얻었다 하잖아요
귀를 닫지 못하게 만든 이유이지요
관상도 이목구비(耳目口鼻) 귀 먼저이구요
그리스 인도서는 시각종교를 믿어 신상(神像)을 만들지만,
손님은 청각(聽覺) 종교를 믿으시죠?
남자는 시각 의존적이지만 여자는 청각적이라서,
여성 환자는 귀를 봐야 알거든요.
—시집『숙맥노트』(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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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 1941년 경북 안동 출생. 1967년 《현대문학》추천완료로 등단. 첫 시집 『달하』이후 『봄비 한 주머니』, 『다보탑을 줍다』『거짓말로 참말하기』『둥근 세모꼴』『걸어서 에덴까지』『숙맥노트』등 17권의 시집이 있음,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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