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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선우 시집 『녹턴』- 검은 미사에서 나를 보았다 외 2편

문근영 2018. 12. 20. 02:33

검은 미사에서 나를 보았다 (외 2편)

 

  김선우

 

 

 

여러 겹의 잠을 차례로 떠내는 중이네.

내 뼈의 나이테에도

고통이 키운 마디가 제법 되네. (누구나 그렇듯)

세월이란 푸른곰팡이 슨 고통의 마디마디

희고 검은 건반이 되는 동안, 이라 적어두는 게 좋으리.

누르면

어떤 장단으로든 음악이 되는

절, 룩, 절, 룩 (누구나 대개 그렇듯)

이 길이 치욕의 쪽인지 평안의 쪽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꺾여 있고 그것을 견디는 동안

뼈의 나이테에도 혼이 생겨서

혼을 닦아주러 오는 또 다른 혼들을 내 눈동자가 볼 뿐

초저녁 울음은 진혼가라는 것

진혼 뒤엔 드넓게 펼쳐진 밤의 힘줄을 딛고

검붉은 먼지구름의 신발이 다가오고

그 신발을 벗겨 머리에 쓰는자,

발톱을 일으켜 세워 (이 순간 누구나는 사라지네)

문밖으로 나서는 자를 나는 기다리고 있다는 것

기다리는 그가 온다면 기꺼이

살 발라진 텅 빈 잠 속으로 나는, 다시

부대끼는 뼈들의 하모니 속으로 나는, 또다시

달려가고자 하는 검은 개요, 전속력으로

고통의 나이테를 화환으로 두른 자로서.

 

 

 

 

이런 이별

—1월의 저녁에서 12월의 저녁 사이

 

 

 

 

그렇게 되기로 정해진 것처럼 당신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오선지의 비탈을 한 칸씩 짚고 오르듯 후후 숨을 불며.

햇빛 달빛으로 욕조를 데워 부스러진 데를 씻긴 후

성탄 트리와 어린양이 프린트된 다홍빛 담요에 당신을 싸서

가만히 안고 잠들었다 깨어난 동안이라고 해야겠다.

 

1월이 시작되었으니 12월이 온다.

2월의 유리불씨와 3월의 진홍꽃잎과 4월 유록의 두근거림과 5월의 찔레가시와 6월의 푸른 뱀과 7월의 별과 꿀, 8월의 우주먼지와 9월의 청동거울과 억새가 타는 10월의 무인도와 11월의 애틋한 죽 한 그릇이 당신과 나에게 선물로 왔고

우리는 매달리다시피 함께 걸었다.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는 한 괜찮은 거야

마침내 당신과 내가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12월이 와서,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리고

우리는 천천히 햇살을 씹어 밥을 먹었다.

 

첫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두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세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그리고 문 앞의 흰 자갈 위에 앉은 따스한 이슬을 위해

 

서로를 위해 기도한 우리는 함께 무덤을 만들고

서랍 속의 부스러기들을 마저 털어 봉분을 다졌다.

사랑의 무덤은 믿을 수 없이 따스하고

그 앞에 세운 가시나무 비목에선 금세 뿌리가 돋을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해 사랑했으므로 이미 가벼웠다.

고마워. 안녕히.

몸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1월이 시작되면 12월이 온다.

 

당신이 내 마음에 들락거린 10년 동안 나는 참 좋았어.

사랑의 무덤 앞에서 우리는 다행히 하고픈 말이 같았다.

 

 

 

 

변검

 

 

 

 

우리가 남이니?

자기 그림자를 뜯어내려는 소년을 끌어안으며 어른이 운다.

그럼 당신이 나예요? 남이지.

난폭하게 잡아 뜯는 소년의 그림자에서 핏물이 떨어질 것 같다.

우리가 어떻게 남이니?

어른의 울음소리가 더 커진다.

웃기시네. 나랑 같은 걸 느끼는 것도 아니면서 척하기는.

어른의 울음소리가 소년의 차가운 웃음에 덮인다.

그런 얘기가 아니잖니?

담장 아래 흰개미 굴이 가득했다. 담은 곧 무너질 텐데.

남인데 남 아니라고 우기면 맘 편해요? 그럼 그러시든가.

소년은 소년대로 사무친 것이 있고

어른은 어른대로 소년이 사무쳤다.

사무쳐서 봄이 왔고

사무쳐서 꽃이 피었다.

사무쳐 벌어진 것만 꽃이었다.

얼룩 같은

얼굴들이었다.

 

 

 

                          —시집『녹턴』(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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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 1970년 강원도 강릉 출생.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도화 아래 잠들다』『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녹턴』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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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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