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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봉옥 시선집 『나를 만지다』- 나를 던지는 동안 외 2편

문근영 2018. 12. 20. 02:32

나를 던지는 동안 (외 2편)

 

   오봉옥

 

 

 

1

 

그대 앞에서 눈발로 흩날린다는 게

얼마나 벅찬 일인지요

혼자서 가만히 불러본다는 게,

몰래몰래 훔쳐본다는 게

얼마나 또 달뜬 일인지요.

그대만이 나를 축제로 이끌 수 있습니다

 

2

 

그대가 있어 내 운명의 자리가 바뀌었습니다

그댈 보았기에 거센 바람을

거슬러 가려 했습니다

발가락이 떨어져나가는 아픔도 참고

내 가진 모든 거 버리고 뜨겁게

뜨겁게 흩날리려 했습니다.

그대의 옷깃에 머물 수 있다면

흔적도 없이 스러져가도 좋았습니다

 

3

 

그러나 나에겐 발이 없습니다

그대에게 어찌 발을 떼겠습니까

혹여 그대가 흔들린다면,

마음 졸인다며,

그대마저 아프게 된다면 그건

하늘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나에겐 발이 없습니다

나를 짓밟는 발이 있을 뿐

 

4

 

그대의 발밑에서 그저 사그라지는 순간에도 난

젖은 눈을 돌리렵니다 혹 반짝이는

눈물이 그대의 가슴을 가르며 가 박힐지 모르니까요

그 눈물알갱이가 그대를 또

오래오래 서성이게 할지 모르니까요

먼 훗날 그대 앞에는 공기방울보다 가벼운

눈발이 흩날릴 것입니다

모르지요, 그땐 그대가 순명의 자세로 서서

나를 만지게 될는지

 

 

 

입술이 붉은 열여섯

 

 

 

그녀는 동갑내기였다 입술이 붉은 열여섯

그녀는 꽃봉오리였다 하루라도 빨리 피고 싶어 안달하는

그래서 그녀는 날 숨막히게 했다

밤 몰래 담 넘어 올래?

초생달처럼 와선 문고릴 두 번만 잡아다닐래?

하여 치렁치렁 늘어트린 긴 머리칼 한쪽으로 묶어내리고

오자마자 나 어때 어때 하며 안겨들던 그녀는

고작 열여섯 꽃봉오리였다

 

그녀는 동갑내기였다 입술이 붉은 열여섯

그래서 그녀는 날 숨막히게 했다

제 오라비가 쓸 신혼방이라며

쉬쉬하며 끄을고 가기도 했던

장롱 속의 새 이불 꺼내며

한 번도 쓰지 못한 그 이불 꺼내며

더럽히면 안 돼 안 돼 하며 목부터 끌어안던 그녀는

내가 미처 사내가 아니어서

내가 미처 사내가 아니어서

"야"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던 그녀는.

 

 

 

펌프의 꿈

 

 

 

이게 뭐지,

화석처럼 굳어있는 게 신기했던지

고추잠자리 한 마리 날아와

낡은 펌프 손잡이를 움켜쥔다

한때는 동네 사람들이

줄을 서 펌프질을 했으리라

아낙네들은 와서 누구 사내는

펌프질을 잘한다네, 못한다네 하고

한참을 히히덕거리다 가고

온종일 동네 어귀에서 놀다 온 아이들은

지들끼리 등목을 하며 으으으 으으으,

새까만 몸을 마구 비틀었으리라

그걸 본 계집애들은 또 까르르르 웃다가

발그레한 얼굴로 돌아갔으리라

저게 죽어서 고철이 된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쓸쓸해진다

나라도 마중물이 되어 저 목울대를 타고

캄캄한 어둠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

손을 내밀고 살을 섞고 싶다

그때면 낡은 펌프도

울컥울컥 울음을 토해내다가 말하리라

 

등목 한번 할래?

 

 

                      —오봉옥 시선집『나를 만지다』(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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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옥 / 1961년 광주 출생.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수료. 창작과 비평사 16인 신작시집 『그대가 밟고 가는 모든 길 위에』에 시 「울타리 안에서」외 7편을 발표하며 등단. 1989년 서사시집 『붉은산 검은피』(전2권)를 발행, 필화를 겪음. 시집 『지리산 갈대꽃』『나같은 것도 사랑을 한다』『노랑』외 저서 다수. 2016년 현재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예지《문학의오늘》편집인.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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