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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송종규 시집 『검은색』- 고딕 숲 외 1편

문근영 2018. 12. 20. 02:32

고딕 숲 (외 1편)

 

  송재학

 

   

 

전나무 기둥이 떠받치는 숲 속

습한 고딕체의 나무가 훌쩍 자라서

연등천장의 내면을 떠받치는 중이다

고딕 숲에서 내 목울대는 하늘거리는 풀처럼

검은색 너머 기웃기웃,

수사복 사내들의 검은색이

나무의 뼈라면

검은색 이야기의 시작은 주인공의 죽음/자살이다

누군가의 메마른 입술에서 나뭇잎이 꾸역꾸역 자랄 때

내 안팎에서도

열리고 닫히는 새순 아가미들의 연쇄반응들,

숲을 떠다니는 부레족(族) 나뭇잎들 만나도 놀랍지 않다

고딕 숲의 부력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관습들에게 열거되는 투니카와 쿠쿨라*의

수도복 입은 발자국이 모여들겠다

오래된 불빛이 울울(鬱鬱) 침엽수를 밝히려 한다면

내 묵언은 닫아야 할 입이 너무 많다

 

 

 

*가톨릭 수도승의 고유 의복.

 

 

 

 

달의 궤도

 

   

 

   강에서 가져온 돌 속에 달이 갇혀 있다 그건 달의 문양일 뿐 달빛이 없다 달이 되지 못하는 돌들은 달의 궤도가 필요하다 돌에 박힌 달은 무표정하고 살짝 찌푸린 근시이다 돌 속의 달에게 중력이 생기는 순간, 가면의 얼굴조차 간절해 보이는 또 다른 가면을 달의 눈이 찾았다 애면글면 달빛이다 움푹 꺼진 기억마다 수면이 생기면서 물을 머금고 선명해지는 달, 인중이 긴 달, 여전히 달의 뒷면은 돌에 박혀 보이지 않는다 달은 어디 갔다가 다시 되돌아 오는가 뱉지 못하는 것을 삼킨 달이 문득 밝아질 때가 있다 그게 사무치는 일이 될 때, 달의 표면은 거칠다 달을 받들고 있는 허공이다

 

 

 

                         —시집『검은색』(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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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학 /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2년 경북대학교 졸업. 1986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얼음시집』『살레시오네 집』『푸른빛과 싸우다』『기억들』『진흙 얼굴』『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내간체를 얻다』『날짜들』『검은색』.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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