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 숲 (외 1편)
송재학
전나무 기둥이 떠받치는 숲 속
습한 고딕체의 나무가 훌쩍 자라서
연등천장의 내면을 떠받치는 중이다
고딕 숲에서 내 목울대는 하늘거리는 풀처럼
검은색 너머 기웃기웃,
수사복 사내들의 검은색이
나무의 뼈라면
검은색 이야기의 시작은 주인공의 죽음/자살이다
누군가의 메마른 입술에서 나뭇잎이 꾸역꾸역 자랄 때
내 안팎에서도
열리고 닫히는 새순 아가미들의 연쇄반응들,
숲을 떠다니는 부레족(族) 나뭇잎들 만나도 놀랍지 않다
고딕 숲의 부력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관습들에게 열거되는 투니카와 쿠쿨라*의
수도복 입은 발자국이 모여들겠다
오래된 불빛이 울울(鬱鬱) 침엽수를 밝히려 한다면
내 묵언은 닫아야 할 입이 너무 많다
*가톨릭 수도승의 고유 의복.
달의 궤도
강에서 가져온 돌 속에 달이 갇혀 있다 그건 달의 문양일 뿐 달빛이 없다 달이 되지 못하는 돌들은 달의 궤도가 필요하다 돌에 박힌 달은 무표정하고 살짝 찌푸린 근시이다 돌 속의 달에게 중력이 생기는 순간, 가면의 얼굴조차 간절해 보이는 또 다른 가면을 달의 눈이 찾았다 애면글면 달빛이다 움푹 꺼진 기억마다 수면이 생기면서 물을 머금고 선명해지는 달, 인중이 긴 달, 여전히 달의 뒷면은 돌에 박혀 보이지 않는다 달은 어디 갔다가 다시 되돌아 오는가 뱉지 못하는 것을 삼킨 달이 문득 밝아질 때가 있다 그게 사무치는 일이 될 때, 달의 표면은 거칠다 달을 받들고 있는 허공이다
—시집『검은색』(2015)에서
--------------
송재학 /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2년 경북대학교 졸업. 1986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얼음시집』『살레시오네 집』『푸른빛과 싸우다』『기억들』『진흙 얼굴』『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내간체를 얻다』『날짜들』『검은색』.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김언희 시집 『보고 싶은 오빠』- 회전축 외 2편 (0) | 2018.12.20 |
---|---|
[스크랩] 오봉옥 시선집 『나를 만지다』- 나를 던지는 동안 외 2편 (0) | 2018.12.20 |
[스크랩] 강서완 시집 『서랍마다 별』- 고전적인 불볕 외 2편 (0) | 2018.12.20 |
[스크랩] 신덕룡 시집 『하멜서신』- 풋잠에 들다 외 2편 (0) | 2018.12.20 |
[스크랩] 박승민 시집 『슬픔을 말리다』- 슬픔을 말리다 외 2편 (0) | 2018.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