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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승민 시집 『슬픔을 말리다』- 슬픔을 말리다 외 2편

문근영 2018. 12. 20. 02:31

슬픔을 말리다 (외 2편)

 

      박승민

 

 

 

   이 체제 下에서는 모두가 난민이다. 진도 수심에 거꾸로 박힌 무덤들을 보면 영해조차 거대한 유골안치소 같다. 숲 속에다가 슬픔을 말릴 1인용 건초창고라도 지어야 한다. 갈참나무나 노간주 사이에 통성기도라도 할 나무예배당을 찾아봐야겠다. 神마저도 무한 기도는 허락하지만 인간에게 두 발만을 주셨다. 한 발씩만 걸어오라고, 그렇게 천천히 걸어오는 동안 싸움을 말리듯 자신을 말리라고 눈물을 말리라고 두 걸음 이상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말리다”와 “말리다” 사이에서 혼자 울어도 외롭지 않을 방을 한 평쯤 넓혀야 한다. 神은 질문만 허락하시고 끝내 답은 주지 않으신다. 대신에 풍경 하나만을 길 위에 펼쳐놓을 뿐이다.

 

   마을 영감님이 한 짐 가득 생을 지고 팔에서 막 빠져나온 뼈 같은 지팡이를 짚고 비탈을 내려가신다. 지팡이가 배의 이물처럼 하늘 위로 솟았다가 다시 땅으로 꺼지기를 반복하는 저 단선의 봉분. 짐만 몇 번씩 길 밖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길 안으로 돌아와서는 간신히 몸이 된다. 짐이 몸으로 발효하는 사이가 칠순이다. “말리다”에서 “말리다”驛까지 가는데 수없이 내다 버린 필생의 가필이 있었던 것이다.

 

 

 

12월의 의식(儀式)

—다시 명호강에서

 

 

 

시집(詩集)을 강물로 돌려보낸다.

 

봉화군 명호면, 너와 자주 가던 가게에서 산

과자 몇 봉지 콜라 한 캔이 오늘의 제수용품(祭需用品)

 

오랜 바람에 시달린 노끈처럼

이 세월과 저 세월을,

간신히 잡고 있는 너의 손을,

이젠 놓아도 주고 싶지만

 

나는 살아 있어서

가끔은 죽어 있기도 해서

 

아주 추운 날은 죽은 자를 불러내기 좋은 날

 

“잘 지냈니?”

“넌 여전히 아홉 살이네!”

 

과묵했던 나의 버릇은 10년 전이나 마찬가지여서

다만 시를 찢은 종이에 과자를 싸서

강물 위로 90페이지째 흘려만 보내고 있다.

담배 향(香)이 빠르게 청량산 구름그늘 쪽으로 사라진다.

 

아무리 시가 허풍인 시대지만

그래도 1할쯤은 아빠의 맨살이 담겨 있지 않겠니?

 

이 나라는 곳곳이 울증이어서

네 곁이 편하겠다 싶기도 하고

히말라야나 그런 먼 나라의 산간오지에서나 살까, 궁리

도 해봤지만

아직 너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작년처럼 너의 물 운동장을 구경만 한다.

 

손가락 사이로 자꾸만 빠져나가는 뜨거운 살들이 얼음

밑으로 하굣길의 아이들처럼 발랄하게 흘러만 간다.

 

 

 

봄과 봄 사이

 

 

 

한 사람이 떠났을 뿐인데

수평선 너머로 금니처럼 반짝, 했을 뿐인데

그를 생각하다가 만 서쪽 창으로

생생한 명함판 사진 한 장 떨어지고 없다

 

피가 하얗던 한 여자가 졌을 뿐인데

운동장에 혼자 서 있는 이 기분

산의 아랫도리만 봄이었다가 겨울이었다가

몸의 내륙으로 이동하는 찬 저기압

 

잊는 힘과 잊지 않으려는 힘 사이에서

콧물과 프리지어 향기 사이에서

곧 눈물 마르고 향내 지워지리라

잊고 잊히는 일은 여기서 또 얼마나 잘 훈련된 관습인가

 

그러니 어느 동고서저(東高西低)의 기압골로 꽃 단청 오를 때

화전 부치는 냄새 거기까지 요란할 때

네가 먼저 문병 와다오

 

이번 독감은 오래가는 고독에 가깝네

 

 

                       —시집『슬픔을 말리다』(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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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민 / 1964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지붕의 등뼈』가 있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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