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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송찬호 시집 『분홍나막신』- 분홍 나막신 외 2편

문근영 2018. 12. 20. 02:31

분홍 나막신 (외 2편)

 

   송찬호

 

 

 

님께서 새 나막신을 사 오셨다

나는 아이 좋아라

발톱을 깍고

발뒤꿈치와 복숭아뼈를 깎고

새 신에 발을 꼬옥 맞추었다

 

그리고 나는 짓찧어진

맨드라미 즙을

나막신 코에 문질렀다

발이 부르트고 피가 배어 나와도

이 춤을 멈출 수 없음을 예감하면서

님께서는 오직 사랑만을 발명하셨으니

 

 

 

귀신이 산다

 

 

 

그는 전쟁과 독재 시절의 과거에서 왔다

어느 장의사가 못질을 잘못한

대지의 관을

간신히 빠져나왔다

 

헝클어진 머리

천 개의 밤을 보아버린 듯한 퀭한 눈

더구나 오래 씻지도 않은 것 같았다

검푸른 이념의 곰팡이가

보기 흉하게 온몸을 덮고 있었다

 

그는 가끔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듯이

혼자 중얼거렸다

어깨 위 허공으로

바나나와 사과를 건네기도 하였다

 

한참 거리를 쏘다니다

쇼윈도 거울 앞에 이르러

자신의 어깨가 조금 기우뚱한 걸 알아챈 것 같았다

그는 히죽 웃으며, 오른쪽 어깨 위의 귀신을 왼쪽 어깨로 옮겨 앉혔다

 

 

 

장미

 

 

 

나는 천둥을 흙 속에 심어놓고

그게 무럭무럭 자라

담장의 장미처럼

붉게 타오르기를 바랐으나

천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로만 훌쩍 커

하늘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는 헐거운 사모(思慕)의 거미줄을 쳐놓고

거미 애비가 되어

아침 이슬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언젠가 다시 창문과 지붕을 흔들며

천둥으로 울면서

떠나갈 수밖에 없다면,

내 그 장미의 목에

맑은 이슬을 꿰어 걸어주리라

 

 

                      —시집『분홍 나막신』(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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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 1959년 충북 보은 출생. 경북대 독문학과 졸업.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 으로 등단.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10년 동안의 빈 의자』『붉은 눈, 동백』『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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