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나막신 (외 2편)
송찬호
님께서 새 나막신을 사 오셨다
나는 아이 좋아라
발톱을 깍고
발뒤꿈치와 복숭아뼈를 깎고
새 신에 발을 꼬옥 맞추었다
그리고 나는 짓찧어진
맨드라미 즙을
나막신 코에 문질렀다
발이 부르트고 피가 배어 나와도
이 춤을 멈출 수 없음을 예감하면서
님께서는 오직 사랑만을 발명하셨으니
귀신이 산다
그는 전쟁과 독재 시절의 과거에서 왔다
어느 장의사가 못질을 잘못한
대지의 관을
간신히 빠져나왔다
헝클어진 머리
천 개의 밤을 보아버린 듯한 퀭한 눈
더구나 오래 씻지도 않은 것 같았다
검푸른 이념의 곰팡이가
보기 흉하게 온몸을 덮고 있었다
그는 가끔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듯이
혼자 중얼거렸다
어깨 위 허공으로
바나나와 사과를 건네기도 하였다
한참 거리를 쏘다니다
쇼윈도 거울 앞에 이르러
자신의 어깨가 조금 기우뚱한 걸 알아챈 것 같았다
그는 히죽 웃으며, 오른쪽 어깨 위의 귀신을 왼쪽 어깨로 옮겨 앉혔다
장미
나는 천둥을 흙 속에 심어놓고
그게 무럭무럭 자라
담장의 장미처럼
붉게 타오르기를 바랐으나
천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로만 훌쩍 커
하늘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는 헐거운 사모(思慕)의 거미줄을 쳐놓고
거미 애비가 되어
아침 이슬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언젠가 다시 창문과 지붕을 흔들며
천둥으로 울면서
떠나갈 수밖에 없다면,
내 그 장미의 목에
맑은 이슬을 꿰어 걸어주리라
—시집『분홍 나막신』(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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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 1959년 충북 보은 출생. 경북대 독문학과 졸업.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 으로 등단.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10년 동안의 빈 의자』『붉은 눈, 동백』『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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