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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형권 시집 『우두커니』- 우두커니 외 2편

문근영 2018. 12. 20. 02:30

우두커니 (외 2편)

 

         박형권

 

 

겨울 상추 좀 먹어야겠다고 지푸라기를 덮어둔 산 아래 밭에

상추 어루만지러 어머니 가시고

빵 딸기우유 사서 뒤따라 어머니 밟으신 길 어루만지며 가는데

농부 하나 밭둑에 우두커니 서 있다

아무것도 없는 밭 하염없이 보고 있다

머리 위로 까치 지나가다 똥을 찍 갈겨도 혹시 가슴에 깻잎 심어두어서

까치 똥 반가이 거두는 것인지

피하지 않는다

무얼 보고 있는 것일까

누굴 기다리는 것일까

아무것도 없는 밭에서 서 있을 줄 알아야 농부인 것일까

내가 어머니에게 빵 우유 드리면서 손 한번 지그시 어루만져보는 것처럼

그도 뭔가 어루만지고 있긴 한데

통 모르겠다

뭐 어쨌거나

달이 지구를 어루만지듯 우주가 허공을 어루만지듯

그것을 내가 볼 수 없듯이

뭘 어루만지고 있다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어루만지는 경지라면

나도 내 마음속에 든 사람 꺼내지 않고 그냥 그대로 두고

서 있고 싶다

그냥 멀찍이 서서 겨울 밭처럼 다 비워질 때까지 그 사람의 배경 되는 것으로

나를 어루만지고 싶다

앞으로는

참을 수 없이 그대를 어루만지고 싶으면

어떤 길을 걷다가도 길 가운데 사뭇 서야겠다

상추 한 아름 받쳐 들고 내려오며 보니 마른 풀도 사철 나무도 농협창고도

지그시 지그시 오래 서 있었다

 

 

 

 

새들이 나를 나무로 볼 때

 

 

  내가 한 소년이었을 때, 동네 뒷산에 올라가 참꽃을 꺾으며 휘휘 분 휘파람 소리에 박새가 날아왔다 내 휘파람 소리에 새들이 알아듣는 자음과 모음이 섞여 있었던지 새들이 들으러 왔다 내가 새들의 허수아비였던지 새들이 내 옆에서 안심하였다 내가 새들의 우체통이었던지 새들이 사연을 맡기고 갔다 나는 새들의 속기사처럼 새들의 노래를 받아 적었다 내 안에 어떤 부호가 있어서 새들이 나를 보고파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는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내가 세상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새들과 나는 멀리서 멀뚱멀뚱 쳐다보는 사이가 되었다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아비가 되어 서울 중랑천 옆으로 이사 온 뒤에 나와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아들을 데리고 중랑천 둑길을 걸었다 기분이 좋아 나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떄 오목눈이 떼가 우리를 지나갔다 머리에 앉아서 이마를 톡톡 쪼아보고 진주 같은 똥도 떨어뜨렸다 내 어깨에 삭정이를 물고 와서 집을 지으려는 놈도 있었다 새들이 갑자기 나를 나무로 보아주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돕는 길이었다 단지 팔을 벌려 새들이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아, 그때부터 아들이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내 귀가 뚫려 아들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새들이 나를 나무로 볼 때에 이르러서야 한 아이의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았다

 

  어제오늘 휘영청 고욤나무로 서 있었더니 날개가 날개를 데리고 와서 감도 아닌 것을 달게 맛보고 갔다

 

 

 

 

 

 

무논에 찍힌 발자국

 

 

오월에 열어놓은 물꼬가

바랭이 방동사니 우묵하게 웃자란 나를 향해 흘렀다

나의 밥에는

무논에 찍어놓은 아버지들의 흔적이

화석으로 남아 있다

밥 익을 때 달콤한 향기가 머무는 쌀눈,

아버지들은 쌀눈으로 나를 본다

아버지가 두 발을 동동 걷고

모판과 사랑을 나눌 때

오월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엎드려 경배하는 것을 산밭에 풀 뽑으러 가다 보았다

논가의 제비꽃이 못줄도 잡아주지 못하는 보랏빛 꽃잎 미안하여 고개를 숙이고

까치와 까마귀가 옆에 있어주었다

한번씩 아버지가 계신 오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논물에 흠뻑 젖은 흙냄새를 맡아보면

나의 허리가 저절로 꺾인다

나는

손에 물흙을 묻히며

갑자기 울고 싶은 논밭의 자식이어서

무딘 발로 무논을 왕래하면서도 어떻게 모 한 포기 밟지 않았을까 하고

목젖으로 생각한다

내가 목젖에 아버지를 심듯이

나를 심장에 심고 더운 피를 흘려 넣은 아버지가 물 가득 채운 다랑논이란 것을,

나도 조심조심 찍어놓은 발자국이란 것을,

오월이 벗어놓은 신발 옆에서 알았다

무논에 찍힌 아버지의 발자국에 올챙이 모여들듯

다음 모낼 때는 딸 아들도 한번 데리고 와야겠다

 

 

 

 

 

 

 

박형권/ 1961년 부산 출생. 2006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우두커니』『전당포는 항구다』『도축사 수첩』, 장편동화『돼지 오월이』『웃음공장』, 청소년 소설『아버지의 알통』.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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