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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덕룡 시집 『하멜서신』- 풋잠에 들다 외 2편

문근영 2018. 12. 20. 02:31

풋잠에 들다 (외 2편)

―하멜서신

 

   신덕룡

 

 

 

이게 무슨 일인지

도대체 설명할 길 없습니다.

 

누구 하나 눈길 건네는 이도 따라오는 기척도 없는데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가도 가도 언제나 제자리, 떠난 자리로 되돌아옵니다.

 

멀리 강진을 지나 마량포구까지 앞서 갔던 마음들도

너덜너덜 찢겨진 채

왼종일 쪼그려 앉아 나막신을 깎던 공방의 끌밥처럼

발밑에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이건 악몽일 뿐이야 누군가의 꿈속에 끌려왔을 뿐이라고

고개를 흔들어보지만

지금 여기, 왜 왔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한 백 년쯤이나 됨직한

의문들, 벗어날 길은 아예 없겠습니다.

 

 

 

옻나무에 스치다

―하멜서신

 

 

 

그냥 지나쳤을 뿐인데

온몸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따지고 보면 독毒이란, 도대체 견딜 수 없는 가려움이거나 끈적거리는 허연 진액이거나 핏빛 선명한 나뭇잎이거나 문풍지를 비집고 들어와 뼛속으로 파고드는 바람, 텅 빈 하늘에서 홀로 반짝이는 별빛이었다.

 

그리움도 마찬가지. 빼낼 수 없는 가시였고 꽉 다문 입술이거나 벌겋게 타오르는 저녁놀이거나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나무 그림자 때로는, 온 산천을 휘젓고 다니던 봄밤의 꽃가루들……

 

그런데

나는, 나의 이름은?

 

마당귀로 몰리던 소소리바람

밤새도록 끙끙 앓아도 풀리지 않는.

 

   

 

병영을 떠나며

—하멜서신

 

 

 

덜거덕거리는 달구지를 끌고 밀며 산모롱이를 돌다

뒤를 돌아보는데

조금 전에 떠나온 저기, 참 멀다.

 

눈발 뒤로 아득하게

병영의 성곽이며 옹기종기 모여 앉은 낮은 지붕들이 지워지고 있다.

조금씩 그리고 한꺼번에

 

일곱 해를 걸어 다닌 골목들, 비바람과 눈보라를 막아주던 오두막, 황금물결로 일렁이던 들녘과 오로지 내 것이었던 손바닥만한 텃밭, 어둠보다 질긴 설움을 씹어가며 버티던 수많은 밤들, 글썽이던 이웃들

 

마지막 이별의 손짓이듯 사방으로 흩날리는

오랜 기억들을 덮어버리는

눈물보다 먼저 앞을 가리는 뿌연 장막들

 

두텁게 펼쳐진 장막을 들추며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라는 ‘언젠가’는

늘 위험천만한 고문이었다.

 

살 만한 곳을 찾아다니며 둥지를 트는 새가 아니었다. 나는

 

아무리 멀리 날아도

때가 되면 정해진 자리로 서둘러 돌아와야만 하는

묶여 있는 슬픔에 불과했으니

 

거세게 몰아치는 눈발 속에 떠나는 길이

가파른 벼랑일지라도

막막할 것 없겠다, 뒤를 돌아볼 일 없겠다.

 

 

                       —시집『하멜서신』(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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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룡 / 1956년 경기 양평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85년『현대문학』, 2002년 『시와시학』으로 평론 및 시 등단. 저서와 시집으로『환경위기와 생태학적 상상력』,『생명시학의 전제』,『소리의 감옥』,『아름다운 도둑』 등이 있음. 현재 광주대 문창과 교수.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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