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인 불볕 (외 2편)
강서완
그러면 칸나는
줄 없는 기타로 어떤 색을 노래할까?
슬픔을 쏟아낸 살결처럼
어둠은 빛의 내면을 찾아가는 것
몸으로 말해야 할 때
삶은 가장 단순해진다
날아오른 무용수가 몸을 펼치듯
더위를 껴안은 칸나는
팔다리와 웃음이 복원된 토르소다
헝클어진 빨강, 폐기된 사물, 허공의 바리케이드, 과거의 해독에 골몰한
폐허를 밤이슬에 씻던
칸나,
발톱에 동여맨 붉은 노래, 부르튼 잎들이 지런지런
쏟아지는 역광을 끌어안는다
안개, 온몸에 비가 내립니다
서랍 속으로 들어갑니다 서랍 속에도 비가 내립니다
페가수스의 수원(水源)에 서식한 불안이 웅크립니다
그가 꽂아 두고 간 기억엔 천 개의 서랍이 있고 천 개의 서랍마다 별이 피었습니다
별 속엔 악보의 감정 사이로 몇 광년의 바람이 지나갑니다 음악이 움튼 호수와 나무 어깨에 돋은 날개와 쏟아지는 색깔들을 어찌할까요 겨울의 음폭과 물결치는 남쪽은 또 어찌할까요
서랍 속에서 잠이 듭니다 천 개의 서랍 속에 비가 내립니다
젖은 달빛 속으로 눈먼 음표들이 날아듭니다 푸른 비린내가 발등에 미끄러집니다 하늘을 마신 긴 목에서 새 한 마리 파닥거립니다 그림자 없는 귀에 붕대를 감습니다 야윈 리듬이 명치를 휘돕니다
밤새 자작나무 이마에서 고열을 나르던 손이 아침을 깨웁니다 천 개의 풍경에 초록이 돋았습니다 이끼 낀 바람이 모서리에 말갛습니다
지지 않는 그늘이 서랍 속에 삽니다
천 개의 서랍 속에 날마다 별빛이 맺힙니다
층층계
1
탕! 탕! 탕!
어떤 인권은 한 세기 전을 살고
누군가는 혁명가로 미래를 살고
저기와 거기의 이념과 국경
유럽과 아프리카의 색깔과 깊이
권력은 캄캄하고
시간은 공간을 장악하고
2
잎 하나에 천 개의 밤
줄기 하나에 천 근 바람
뿌리 하나에 무량수의 비
보이지 않는 모서리들
쉴 새 없이 층을 높이고
3
불면으로 몸이 휜 그가
비탈에서 흔들린다
계단 끝에 계단이 또 있을까
높은 의자가 기다릴까
허리는 어떤 각도로 굽혀질까
관습적인 무릎이 부서질지 몰라
되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
4
문득, 여기는 지구
아침이 기필코 돋아나는 곳
새와 뱀, 책과 칼, 백로와 까마귀, 저울과 가슴의 거리
태양은 새벽부터 잠자는 국경을 깨우지
—시집『서랍마다 별』(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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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완 / 1958년 경기도 안성 출생. 동아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 2008년 《애지》로 등단. 시집 『서랍마다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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