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축 (외 2편)
김언희
23도26분21초4119
지구의 기울기는
발기한
음경의, 기울기
이 기울기를
회전축으로
지구는
자전한다
캐논 인페르노
손에 땀을 쥐고 깨어나는 아침이 있다 손에
벽돌을 쥐고 눈을 뜨는 아침이
있다 피에 젖은
벽돌이 있다 젖은 도끼 빗이 있다 머리 가죽이
벗겨질 때까지 나를 빗질해대는 가차 없는
빗살이 있다 가차 없는 톱니가
있다 옆집 개를 톱질하고 온
전기톱이 전기 톱니가 있다 무서운
틀니가 있다 죽은 사람의 틀니를 끼고
씩 웃어보는 자정이
있다 똥을 지리도록 음란한 자정이 있다 음란하기
짝이 없는 목구멍이 있다 괄약근 없는
식도(食道)가 있다 대대로
물려받은 음탕한
괄호가 있다 그 괄호를 납땜하는 새파란 불꽃이
있다 내 배때기를 푸욱 찔러라 찔러
이 방 저 방 따라다니는 노모의
칼끝이 있다 밤새도록
콕콕콕 찍히는 마룻바닥이 있다 뒤통수가
있다 발이 푹푹 빠지는 거울이
발이 쩍쩍 들러붙는
역청의 거울이 있다 거울 속에 시커먼 똬리가 있다 당신은 뱀에 감긴 사람이야 친친 감긴 채
살아 당신만 몰라 모르는 사람이
있다 모르는 손이
모르는 벽돌을 쥐고 진종일 떠는
하루가 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곳에서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이 되어 눈을 뜨는 하루가
있다 내 혀가 뭘 핥게 될지 두려운 곳에서
내 두 손이 뭔 짓을
하게 될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곳에서
비희도(秘戱圖)
새끼 한 마리를 키워내기 위해 사자는
평균 삼천 번의 교미를 한다
뒷고기집 바람벽에 덜 뜯긴 선거용 포스터가 여태
나붙어 있다 육개월간 교미 자세를 유지하는
개구리도 있긴 하지만
볼펜이나 빨대를 물고서 완성했을 저 살신
성인의 미소로 얼굴의 가랑이를
쩌억 벌어뜨린 채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살겠다고 아아 살겠다고 삼십년간 교미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나는 살아
보겠다고 당신과
삼십년간
보험성 교미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나는
탔는지 깔렸는지 헷갈리는
삼십년을
삶은 돼지머리처럼
주둥이로 나무젓가락을 악물고서 저 미소
대가리가 잘려야 완성되는 저 미소
죽어야 완성되는 저 미소
를
띤 채
—시집『보고 싶은 오빠』(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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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희 / 1953년 경남 진주 출생. 198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트렁크』『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뜻밖의 대답』『요즘 우울하십니까』『보고 싶은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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