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사 (외 2편)
황봉학
태초에 땅에는 검은 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돌로 점을 치는 주술사가 있었다
그는 돌에서 화살촉을 꺼내 이리떼를 죽이고 곰을 죽였다
이리와 곰을 먹고 자란 그는
주술의 힘을 빌려 다른 종족의 머리에 화살을 박았다
화살촉이 두려운 종족은 그의 종이 되고
그는 돌에서 황금을 꺼내 왕관을 만들고
자궁을 향락이라는 이름으로 병들게 했다
그는 돌에서 탑을 꺼내 신전을 세우고 신을 만들었다
주술의 힘은 악어의 자궁보다도 강하다
그는 마침내 돌에서 우라늄을 꺼내 스스로 신이 되었다
주술 한 마디로 이 땅을 또 다른 돌로 만들 수 있다는 그는
또 다른 주술사가 탄생하는 것이 두려워
주술 읊는 것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주술사는 태초에 어둠에서 태어난 것임을 그는 잘 안다
하지만 아무리 불을 밝혀도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땅 곳곳에서 새로운 주술사가 태어나고
주술의 힘을 믿는 그들은 또 다른 종족의 머리에
잘 다듬어진 돌을 겨눌 것이다
3분간
물에 빠진 당신의 살점을 뚫고 수천 마리의 거머리가 파고 들어 온다면
누런 구렁이가 당신의 목을 감고 조여 온다면
숲에 갇힌 당신이 호랑이에게 내장을 파 먹히는 중이라면
지구가 온통 용암으로 들끓는데 당신 혼자 맨발로 걸어가야 한다면
105층 빌딩에서 떨어진 당신의 심장이 터져 검붉은 피가 용솟음치며 펄펄 뛰고 있다면
끓는 기름통에서 당신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다면
문득 밥알들이 구더기로 변해 우글거리고 있다면……
있다면,
허수아비
허수는 아비의 아들이다
그러나 아비만 보이고 늘 허수는 안 보인다
아비는 너른 땅덩이를 호령하며 살지만 물려줄 아들은 없다
아비의 적은 늘 참새다
아무런 노력을 보태지 않고 남의 것을 훔쳐 먹는 참새는 도처에 널려 있다
알면서 아는 체하는 건 하수가 하는 짓이다
적당히 웃음으로 눈감아주는 것
아비는 공짜로 얻어먹은 게 너무 많다는 걸 잘 안다
적당히 타협점을 찾는 건 고수가 하는 짓이다
한쪽으로 돌아앉아 뒤쪽은 눈감아주는 것
그것이 남는 장사라는 걸 아비는 잘 안다
없는 아들을 있는 체하는 것
그건 하수들이 고수를 얕잡아 보지 못하게 하는 비책
아비는 허수虛數의 아들을 만들고 양육비를 세금에서 공제한다
참새들이 훔쳐 먹은 몇 알은 곱빼기로 감가상각 처리되고
햇볕보다 구름이
바람보다 습기가
비보다는 천둥이 더 많이 찾아오더라며
생산량을 적당히 축소한다
훔쳐 먹는 참새를 보고 아비가 히죽 웃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허수虛數의 아비는 그래서 고수다
아무도 벼 알을 세어 본 이는 없다
시집 『주술사』(현대시학, 2016) 에서
황봉학 / 1957년 문경 출생, 2011년 《애지》로 등단, 시집 『주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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