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여자 박물관 (외 1편)
한이나
악기 박물관의, 가슴뼈에서
꺼낸 물감상자들
흐린 얼굴로 심금을 긁는 극저음의 첼로
파란을 가라앉히며 저녁 길을 떠메고 가는 콘트라베이스
물밑 모래 우는 소리를 밟고 낮게 길 떠나는 피콜로
수백 년 물굽이를 놓치고 이으며 서쪽으로 가는 오보에
오로지 자신의 몸통을 울려 꽃 피어나는 소리의 향기다
살이 모래로 부서져, 사구에 닿아, 모래여자로 쌓일 때까지
나의 아다지오에게 가는 먼 길이다
가슴뼈에서 꺼낸 물감상자 색색의 소리는
내가 아끼는 물의 협주곡
악기 박물관의 가슴뼈 통증에서
꺼낸 물감상자들
유리 자화상 2
성에 낀 유리벽에 기대어
바깥세상을 보고 있었어
여기는 이 세상의 어디쯤일까
나였던 그 아이
단발머리 소녀가 오래된 떡갈나무로 서 있고
산비알에 앉아 뭔가를 끄적이고 있어
맘은 늘 먼 데 하늘가 뭉게구름을 데불고 노는
창틀 안과 밖의 틈 사이
용케도 이겨낸 눈부신 기적, 여기 있음은
네 덕분이야 한 뿌리로 묶은
유리가 끌고 온 햇살의 따듯한 온정
그건 성에 낀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꾹 꾹
글자를 눌러 쓰던 일이야
속이 보이지 않는 그리움을 뼈아프게 호명하는 일이야
꿈쏙에서조차 한 번도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내 삶에
지나가는 사람처럼 달랑 사진 한 장으로만 남은 사내
감히 사랑해도 되는 걸까 아. 버. 지
—시집『유리 자화상』(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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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이나 / 1951년 충북 청주 출생. 청주교육대학 졸업. 1989년《시와 의식》으로 등단. 시집 『가끔은 조율이 필요하다』『능엄경 밖으로 사흘 가출』『귀여리 시집』『첩첩단풍 속』『유리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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