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이 꺼지는 순간 (외 1편)
려 원
툭 하고 꺼졌다
아버지는 캄캄한 방을 흔들어 촬촬 소리가 나면
불꽃이 수명이 다한 거라 했다
할머니에게 주려고 동백을 돌려 땄다
그때 퍽, 봄이 꺼졌다
알을 빻은 동백을 삼베주머니에 넣고
쥐어짜던 두 손 사이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흘렀다
거센 물줄기만 끌어 올리던
할머니의 머리카락은 길게 아래로 흘렀다
꽃은 전류를 타고 온다
돌려 딴 동백을 받은 적이 있다고
돌려 끼우면, 백열등은
공중에 매달린 꽃이 된다고 지금도 믿는다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백열등을 돌려
방을 끈 적이 있다
떨어질 때 꽃술이 끊어지고
검은 머리카락이 풀렸다
꽃가지 하나를 꺾으면
몇 송이의 꽃들이 툭 하고 꺼지는 순간이 있다
검은 통로를 가다
아직 뒷다리가 자라나지 않은 노인은
올챙이처럼 꼬리를 꿈틀거린다
자꾸 끊어지는 찬송가를
검은 테이프가 둘둘 감고 있다
이팝나무 잎 피고 지는 그 사이
누군가는 끊어진 계절을 둘둘 감고 있었을 것이다
검은 테이프는 냉정하게
우주에 가득 핀 전류를 차단한다
찌릿찌릿한 꽃들을 켜고 끄는 사이
태양을, 달을 돌돌 감는 지구
파란 이파리도 앙상한 가지도
모두 검은 연결을 타고 오고 간다
아무도 밝히지 못하는 구간이 분명 있다
연결을 마친 전선의 끝에선
강 같은 평화 반짝, 흘러나온다
노인의 하반신은 아마도
오래전에 끊어진 자리일 것이다
둘둘 말린 피복 속엔 이어 붙인 순응이
220볼트로 흐르고 있을 것이다
—시집『꽃들이 꺼지는 순간』(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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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원 /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전 원통고등학교 국어교사. 2015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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