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푸른 섬 (외 1편)
문현미
한 순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거나
사랑이라는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뇌관을
수직으로 전율하게 하는 것이 있다
뜨거운 내면의 힘으로
꾸욱 눌러 쓰는 손의 근육으로
하얀 묵음의 바다에서 무채색 노를 저어
그 섬으로 간다
그 섬으로 간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아무도 찾지 못하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가시투성이 슬픔과 애써 감춘 아픔과
배신의 등 뒤에서 머뭇거리던 분노와
분홍 나팔꽃의 추억을 녹이고 걸러
한 땀, 한 땀씩
애벌레가 품은 꿈의 날개가 연필심에 닿으면
가만, 가만히 먹빛으로 꿈틀거리다가
기어이 한 마리 흑룡으로 날아오른다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새 하늘이 보인다
깊고 푸른 그곳, 그 섬으로 간다
바람이 불고 있다
빗방울을 수직으로 받는 총부리에
쓸쓸한 고요가 노숙하고 있다
정물 같은 경계병의 수척한 눈동자에
고이는 익숙한 불안의 냄새
오랜 시간 되풀이해 온
습관의 배후가 몹시 궁금하다
한 걸음도 더는 나아갈 수 없다면?
부재가 농울치는 도라산역 출경구 앞에서
누구도 겨냥하지 않는 총을 들고
이쪽 저쪽의 탄알을 계속 장전하고
비릿한 쇳내가 스멀스멀 배어나는
철책선 가까이에 가까스로 다다른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낯선 민간인
아무리 꾸욱 눌러 써도 터지지 않는
낡은 탄피 같은 자음과 모음으로
비무장의 시를 바람결에 작두 타듯이 갈기며
내용도 없이 형식도 없이
자꾸만 비틀, 비틀거리며
—시집『깊고 푸른 섬』(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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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미 / 1957년 부산 출생. 부산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졸업. 독일 아헨대학교 문학박사. 1998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기다림은 얼굴이 없다』『칼 또는 꽃』『수직으로 내리는 비는 둥글다』『가산리 희망발전소로 오세요』『그날이 멀지 않다』. 현재 백석대학교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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