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재 수난사>(52) /
석가탑 다라니경(釋迦塔 陀羅尼經)의 위기일발
재벌과 사회 권력층의 고미술품 수집열은 도굴을 조장하는 한 원인이었다. 1965년을 전후해서 전국의 직업적 또는 일시적인 도굴군의 총수는 약 천여 명으로 추산됐다. 그들은 고분만 도굴하는 것이 아니라 국보 석탑까지 무너뜨리거나 지렛대로 한쪽을 들어 올리고 내부의 사리 장치 유물을 훔쳐냈다.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각종 도굴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범인들은 그 때마다 수배당하고, 대개 검거 구속된 후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았으나 얼마 안 있어 모두 풀려나왔다. 문화재 보호의 최대의 암인 도굴꾼의 범행은 좀처럼 뿌리가 뽑히지 않았다. 최근엔 법이 강화되어 도굴 사건이 거의 사라진 듯이 보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근절됐다고 믿기도 어렵다.
전체 국민의 분노를 샀던 가장 악질적이고 대담한 도굴배들의 범행은 경주 불국사 석가탑(국보 12호)의 유린과 내부 유물의 탈취 기도였다. 1966년 9월의 사건이었다. 감히 석가탑의 내부 유물을 노린 범인들의 배후의 인물은 경주 시내의 악명 높은 골동상인 윤 아무개였다. 9월 3일, 윤의 집에서 유 아무개, 주 아무개, 임 아무개 등 4명이 치밀한 계획을 짠 후 그 날 밤 11시에 불국사로 침입했다.
그러나 주가 준비했던 재크가 거대한 3층 석탑(석가탑)의 중심부를 한쪽으로 들어올리기엔 너무 작아 1차 기도는 결국 실패했다. 다음날, 대구에 가서 급히 구해 온 대형 오일 재크를 갖고 유와 주가 2차로 불국사에 접근해 갔다. 역시 밤 11시께 고요한 한밤중을 택했다. 그들은 재크로 석가탑의 1층 옥개석 한쪽을 들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속엔 아무 것도 없었다. 다음날 밤, 3차 범행이 시도되었다. 이번엔 3층 옥개석을 들어 젖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범인들이 노렸던 사리 장치 유물은 만질 수 없었다. 또 허탕이었다.
[불국사 3층 석탑 사리 장엄구] 국보 126호
금동제 사리 외함
금동 방형 사리합
청동제 비천상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만일 다음날 아침에 불국사 승려가 석가탑의 이상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던들 법과 사회 도의를 비웃던 범인들은 그 날 밤 2층 옥개석을 마지막으로 들어 올려 보고 마침내 세계 최고의 목각 인쇄물인 다라니경과 참으로 귀중한 불국사 창건 당시의 수십 점의 석가탑 사리 장치 유물(현재 일괄하여 국보 126호)을 고스란히 절취하는 데 성공하였을는지도 모른다. 위기일발의 모면이었다.
당시 석가탑은 범인들의 무자비한 재크 사용으로 석탑의 한 부분이 깨져 나가고 탑신 전체가 한쪽으로 기울어 무너질 듯한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도굴범들의 소행임이 분명하다고 본 불국사 측은 긴급 신고를 했고, 경주 경찰서는 용의자를 수배한 지 며칠 만에 범인 일당을 검거했다. 잡혀 온 범인들은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탑을 해체해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었다.
범인들이 건드려 한쪽으로 위험스럽게 기운 석가탑을 그대로 둘 수 없었던 문공부 문화재 관리국은 탑의 피해 상을 바로잡고 사리 장치 유물의 안전 여부도 확인하기로 결정했다. 문화재 전문가와 석조물 보수 전문가들이 현지에 내려가 해체·보수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작업 도중 2층 옥개석이 로프에서 떨어져 일부가 파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또 발생했다. 그러나 바로 그 밑에서 ‘다라니경’과 사리 장치 유물들이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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