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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 문화재 수난사>(51) / 최대 규모의 현풍 도굴 사건

문근영 2017. 4. 13. 09:06

<한국 문화재 수난사>(51) /

최대 규모의 현풍 도굴 사건



논과 밭에서 일하던 농부가, 혹은 토목 공사장의 인부가, 그 밖에 고철 수집상인, 나무꾼, 마을 언덕에서 놀던 어린이가 전혀 뜻밖에 중요한 매장 문화재를 출토시킨 후 문화재 보호법의 절차에 따라 신고하고 물건을 국가에 바침으로써 수만 원에서부터 백만 원대에 이르는 보상금을 타는 일이 1960년대에 속출했지만 반면 직업적인 범죄의 도굴이 가장 성행한 것도 그 시기였다.


유명한 현풍 도굴 사건이 일어난 것은 1963년의 일이었다. 경북 달성군 현풍면 일대에서 두더지처럼 고분을 파고 들어가서 부지기수의 각종 부장품을 꺼내 팔아먹던 패거리 일당이 검거 되고 나아가서 서울의 유력한 인사가 그들의 도굴품 가운데 일부 중요한 물건을 사 가졌던 사실이 드러나 세인을 놀라게 했던 사건이다. 시가 2천만 원 상당의 고분 유물 400여 점을 약 2년 동안 탈 없이 파먹던 최대 규모의 도굴꾼 일당이었다고 당시 신문들이 대서특필했던 이 현풍 도굴 사건의 배후에는 악질적인 자금 조달 및 불법적인 매수자로 대구의 골동상인 장 아무개, 윤 아무개, 최 아무개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교사되어 현풍면 일대의 고려 및 신라시대 고분들을 조직적으로 도굴했던 불법 행위자 6명은 현지의 농민과 외래 침입자였다.


그들의 조직적인 범죄는 19614월 중순에 착수되었음이 경찰 조사에서 밝혀졌다. 범인들은 첫 범행으로 현풍면 하동 뒤쪽의 고려고분들을 도굴, 50점의 고려자기를 꺼내는 데 성공했다. 장 아무개, 윤 아무개가 그것들을 사주었다. 장과 윤은 그 중 30점을 당시 대구 J모직회사에 와 있던 일본인 하야시에게 20만 원을 받고 팔아넘겼다. 그 후 현풍 지방에서는 수십 회에 걸친 도굴이 거듭되었다. 도굴 유물들은 그 때마다 장 아무개와 윤 아무개, 최 아무개에게 넘어갔다가 다시 서울로 밀매되어 일부 중요한 것들은 많은 수장가의 손에 들어갔다.


196328, 대구 경찰에 의해 일망타진된 현풍 도굴꾼과 배후의 조종자 및 도굴품의 중간 취득자들이 경찰에 자백하면서 그 압수한 각종 유물 가운데 관계 전문가들이 깜짝 놀란 중요한 물건은 삼국시대의 금동 안장 금구금관’, 기타 희귀한 가형토기, 마형토기, 오리형토기 등이었다. 삼국시대 유물로는 최초의 출현인 말안장의 금구는 196110월에 도굴배 일당 중의 강 아무개와 구 아무개가 안동군 일직면에 있는 구분에서 캐낸 후 대구 골동상에게 단돈 36천원을 받고 팔았다. 그 후 중간 취득자였던 골동상인은 당장 100만 원을 호가하면서 비밀히 전해할 곳을 찾고 있다가 미처 처분하지 못했던 수백 점의 다른 도굴 유물들과 함께 경찰에 압수당했다. 압수 도굴품들은 뒤에 국립 박물관이 모두 접수했다.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국보 138



그러나 그 때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국보급의 순금관 하나를 현풍 도굴꾼들이 도굴했던 사실이 마저 드러난 것은 범인들이 대구 지검에 구속·송치된 지 약 5개월 후인 7월에 검찰의 심문 과정에서였다. 이 금관은 19623월에 일당 중의 구 아무개가 도굴하여 대구의 윤 아무개에게 구화 110만 환을 받고 팔았다. 그러나 실제로 도굴한 것은 5개월 전 고령 지방에서였다고 범인은 검찰에서 자백했다.

윤은 그의 손에 들어온 최대의 고분 유물인 삼국시대의 금관을 돈 많은 수집가에게 거액으로 전매하기 위해 즉시 서울의 골동상 김 아무개, 장 아무개와 접선했다. 그러다 장 아무개의 소개로 이병철 컬렉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때의 계약 가격이 구화로 1,100만 환(화폐 개혁 후 110만 원)이었다고 한다.


현풍 도굴 사건의 주범들은 검거된 후 문화재 보호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했다. 반면 몇 다리를 건너 금관을 입수했던 이병철(李秉喆; 1910~1987) 재벌은 선의의 수집이 묵인되어 별 말썽 없이 그의 수장품으로 낙착되었다. 그러나 이 금관은 그 후 근 10년간 일체 공개하는 일이 없어 관계 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집중시켰었다.


그러다 19714월에 국립 박물관에서 호암(湖巖; 이병철 씨의 아호) 컬렉션이 특별 전시될 때에 처음으로 공개된 후 국보 138로 정식 지정되었다.


196410월엔 서울에서 도굴꾼 일당이 검거되었다. 서울 중부서가 박 아무개 등 3명의 직업적인 범인과 그들의 도굴품을 사 주던 배후의 장물아비 김 아무개를 긴급 구속하고, 김의 집에서 고분 도굴 유물인 고려자기와 조선자기 수 백점을 압수했던 사건이다.


서울에 주소를 둔 이 때의 도굴범들은 특히 전국 곳곳의 태릉[태실]을 전문적으로 파헤쳐 조선 역대 황족의 태를 넣어 묻었던 최고 품질의 백자 태항아리들을 꺼내다가 김 모를 통해 팔아먹고 있었다. 경찰에 검거되어 자백한 바로는 그들은 구속될 때까지 3년 동안 서울 인근은 물론, 경기도 광주 지방, 더 나아가서 강원도 원주·속초·삼척, 충북 충주, 경북 울진 등지까지 도굴 지역을 확대시키다가 마침내 꼬리가 잡혔다. 그들에게 태릉의 소재지와 태항아리 전문 지식을 알려준 김 아무개는 한국전쟁 전부터 골동 중개인이며 암매상이었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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