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스크랩] <한국 문화재 수난사>(13) / 석굴암(石窟庵)의 감불(龕佛)과 불국사 다보탑(佛國寺 多寶塔)의 돌사자

문근영 2017. 1. 24. 09:32

<한국 문화재 수난사>(13) /

석굴암(石窟庵)의 감불(龕佛)과 불국사 다보탑(佛國寺 多寶塔)의 돌사자




작고 아름다운 대리석 5층 소탑이 증발하던 무렵에 석굴암은 또 다른 석조물을 도난당했다. 굴대 주벽 위쪽에 배치된 10개의 감실에 하나씩 안치돼 있었던 작은 석상들 가운데 2점을 훔쳐간 자가 있었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인의 소행이었다.


석굴암이 일본인들에게 주목되기는 19071908년의 일이었다. 어떤 일본인의 기록을 빌리면, “1907년께에 토함산 꼭대기 동쪽에 큰 석불이 파묻혀 있다는 말이 누가 발설했는지도 모르게 당시 일본인 사이에 퍼졌었다.”고 한다.


다른 어떤 증언은 그 때 일본인들에게 처음으로 석굴암의 존재를 알린 사람은 우연히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던 우편 배달부였다고 한다. 당시 우편국장은 일본인이었다.


그 즈음의 석굴암은 석축의 둥근 천장 일부와 전실부가 무참히 허물어져 석굴 전체가 온통 파괴된 상태였다. 그리고 중들은 의병 난리 이후 산 밑으로 모두 피신하여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 틈을 타서, 일본에 실어가면 크게 돈을 벌 수 있는 이 땅의 문화재를 찾아 안 가는 데 없이 헤매던 일본인 무법자들이 옳다구나 하고 침입했던 것이다. 그들은 석굴암에서 손쉽게 운반할 수 있었던 작은 감불 좌상 둘만 훔친 것은 아니었다. 석굴 본존의 뒤켠 둔부를 무자비하게 때려 파괴했는데 혹시 그 속에 복장 유물이라도 들어 있지 않을까 해서 저지른 만행이었다.






이때의 일본인 무법자들은 불국사에서도 석조물을 약탈했다. 다보탑의 상층 기단 네 귀퉁이에 놓여 져 있던 작은 돌사자상 넷 중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나쁜 하나만 남기고 모두 들고 달아났던 것이다. 당시 불국사엔 몇 명 안 되는 중들이 있었다. 일본인 악당들은 그들을 위협하고 몇 푼의 돈을 집어주고는 유유히 사라져 갔다. 소위 통감부시기에 한국에 건너와서 경주군 주석 서기로 있으면서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 1849~1910) 통감의 불국사 및 석굴암 관람을 안내했던 기무라 시즈오(木村靜雄)가 뒷날 이런 말을 쓰고 있다.


나의 (경주군) 부임을 전후해서 도둑놈들에 의해 환금(돈 주고 빼앗았다는 뜻)되어 나이치(일본 본토)로 반출돼 있는 석굴 불상(석굴암 감불) 2구와 불국사의 다보탑 사자 1(2, 정확히 3)와 등롱(사리탑) 등 귀중물이 반환되어 보존상의 완전을 얻는 것이 나의 죽을 때까지의 소망이다.”(<조선에서 늙으며>, 1924)


이 글로 미루어 기무라도 석굴암과 불국사에서 귀중한 유물을 약탈해 간 일본인 소행에 매우 분개하고, 그 행선지를 알아내려고 애쓴 것 같으나 소네 통감이 불법 반출한 석굴암 5층 소탑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반면 기무라는 또 하나의 비화를 적고 있는데 석굴암이 하마터면 모조리 해체되어 서울로 운반될 뻔했다는 얘기다.


소네 통감이 불편과 험난을 무릅쓰고 토함산을 올라 석굴암의 놀라운 구조와 감동적인 불상 조각들을 구경하고 5층 소탑까지 빼돌린 후, 세키노가 현지를 학술적으로 조사하여 그 역사적예술적 가치를 최고로 평가하자, 통감부는 보수 및 보호 방법을 검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의 결론이 석굴암의 불상 전부와 불국사의 철불을 서울로 운반하자는 것이었다. 통감부는 즉각 경상 관찰사를 통해 그 계획을 현지 군수에게 알리고, 소요 경비의 견적서를 올리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로선 도저히 불가능한 계획이었고, 현지 여론도 심상치 않아 흐지부지 취소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때의 계획으로는 해체한 석굴암의 석불과 기타 모든 석재를 토함산에서 약 40리 내려온 동해안의 감포를 통해 배로 인천까지 운반한다는 것이었다. 한일합방 직전의 일이었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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