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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 문화재 수난사>(12) / 석굴암(石窟庵)에서 사라져버린 아름다운 5층 소탑(五層石塔)

문근영 2017. 1. 22. 07:43

<한국 문화재 수난사>(12) /

석굴암(石窟庵)에서 사라져버린 아름다운 5층 소탑(五層石塔)





1909년 가을의 일이었다. 신라의 고도 경주 일원의 고적을 보러온 일제 고관 일행이 있었다. 2대 통감이 된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 1849~1910)가 초도순시라 하여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경주를 찾은 것이었다. 그들은 불국사로 해서 석굴암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간 후 석굴암 안에 있던 아름다운 대리석 5층 소탑이 온데간데없이 증발했다. 소네가 개인적으로 탐을 냈었거나 아니면 어딘가에(저희 황실 같은 데) 선물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빼돌린 것이 분명했다. 일본인들조차 그것은 소네가 가져갔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증언 기록들이 그 사실을 명백히 알려준다.


먼저 경주 박물관 초기(1930년 전후)에 촉탁으로 관장을 대리했던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의 증언이다.


지금 석굴암의 9면 관음(11면 관음의 잘못) 앞에 남아 있는 대석 위에 불사리가 봉납됐었다고 구전되는 소형의 훌륭한 대리석제의 탑이 있었는데 지난 명치 41년 봄(42년 가을의 착오. 1909)에 존귀한 모 고관이 순시하고 간 후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경주의 신라 유적에 대하여>에서)


다음은 한국의 미술과 민예의 열렬한 연구가였던 야나기 무네요시(柳 宗悅; 1889~1961)의 언급이다.


목격자의 술회를 빌면 11면 관음 앞에 작고 우수한 5층 석탑 하나가 안치돼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소네 통감이 가져갔다고 말하고 있으나 정말인지는 알 수 없다.”(<석불사의 조각에 대하여>, 1919)


1925년까지 10여 년간 경주에 살면서 신라의 유적을 조사연구한 후 1929년에 <조선 경주의 미술>이란 책을 낸 나카무라 료헤이(中村亮平)도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불타(석굴암 본존상) 뒤의 9(11) 관음 앞에 자그마하고 우수한 5층 석탑이 안치돼 있었는데 언젠가 사라져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쓸쓸히 대석만 놓여 져 있을 뿐이다. 풍문을 빌리면 모 씨의 저택으로 운반되어 갔다는 것이다.”


이상의 여러 증언으로 미루어 석굴암의 5층 소탑 증발이 소네 통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은 명백하다. 1967년의 <석굴암 수리 공사 보고서>도 과거의 굴대 5층 소탑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소네에 의해 약탈되었다.”고 명기하고 있다. 석탑을 약탈당한 후, 석굴암은 탑상을 구비하였던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불상들만 있는 석굴이 되고 말았다. 이는 오늘날 국보 중의 국보인 석굴암으로서는 커다란 상처이다.


소네는 소위 한국 통감으로서 1년도 채 있지 않았지만 이 땅의 문화유산, 특히 옛 책(고서)들을 대량으로 수집하여 일본 황실에 헌상한 사실로 미루어 석굴암 소탑 쯤 예사로 빼돌릴 수 있는 자였다. 그가 일본으로 대량 반출한 한국의 옛 책들도 고려자기 도굴꾼과 같은 패거리였던 또다른 무리의 일본인 무법자들이 곳곳에서 약탈 혹은 협박하여 헐값으로 빼앗은 것들이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가 고려자기를 무더기로 실어내 간 짓과 똑같은 수법으로 소네는 한국의 구가와 서원과 사찰에서 갈취한 귀중한 서적들을 무더기로 반출해 갔다. 그 일부는 1965년까지 일본 궁내청 서릉료(서고)에서 소네 아라스케 헌상본이라 하여 은밀히 보관되다가 한일 국교 정상화 후 반환 문화재의 일부로 돌아와 현재 국립 중앙 도서관에 들어가 있다.


반면 석굴암의 5층 소탑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해방 후 국내 관계 전문가들이 일본 안의 행선지를 백방으로 탐색해보았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국내 전문가들은 아직도 정보 추적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다. 그들은 이 아름다운 5층 소탑이 일본의 어딘가에서 언젠가는 발견될 것으로 믿고 있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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