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애지》신인상당선작품 / 문영수
겨울 섬진강
이 겨울, 지리산 언 물 밀어 내리느라 날 새는 이여!
긴 옥양목 천 풀 먹여 풀어놓고
구례도 아니게 하동도 아니게
얼음길 내고 있는 이여!
얼음 위에 쌀알 같은 눈 굴려 쌓으며
해질녘이면 숯불 피워 오천년 남루를 다림질하는 이여!
강둑 저 청청한 대나무 숲 흔들어 키우며
늙은 칡넝쿨 같은 뚝심으로 긴긴 허기 버텨 온 이여!
저기, 낚시꾼들이 버리고 간 의자처럼 막막한 날들 안고
구르고 구르다 몽돌같이 옹송그리고 잠들었던 날짜여!
저 얼음 밑에서 시침 뚝 떼고
썩은 가랑잎 우려내며 새 물 갈아 붓고 있을 이들
얼음에 잠겨 잘려진 나룻배에 부딪혀 돌아오는 바람처럼
세상 끝 돌고 돌아, 되돌아 봐도 거기 그대로 흐르고 있을 이여!
돌아가다 다시 건너다 봐도 그대,
거기 얼어 있을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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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단 만들기
아주 오래 전 동짓날, 찹쌀경단을 만들고 있는 어머니 옆에서
오 남매가 침을 꿀꺽거리며 구경을 했었다.
어머니 손끝에서는 흰 경단들이 요술처럼 떨어졌다.
소똥구리가 TV속에서 소똥으로 경단을 만들고 있다.
나, 찹쌀가루로 경단을 만든다.
소똥구리 새끼도 그의 어미가 했던 것처럼 소똥으로 경단을 만든다.
자신보다 더 큰 경단을 만들어 물구나무서듯 엎어져 뒷다리로 굴리고 간다.
하늘로 솟구친 엉덩이가 소똥 경단에 납작 붙어 하마 놓칠세라 뒷다리로 버티며 굴리고 간다.
저런, 굴러가던 경단이 오르막에 걸린다.
안절부절 경단 주위를 돌아보다 오던 길로 다시 되돌아간다.
그 때 그가 지나는 풀밭은
살짝 파인 발자국도 작은 돌멩이도 거대한 장애물
그는 촉수 끝 더듬이 하나로 아니
초단파의 뒷걸음질로 그의 토굴을 찾아간다.
나, 어머니가 했던 것처럼 하얀 경단을 쟁반에 굴린다.
나, 하얀 경단을 팥물에 집어넣는다.
끓는 물 속에 어머니의 경단이 수끌수끌 끓는다.
어머니와 나, 거대한 소똥경단을 끝없이 굴리며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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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몰민
―주암 땜에서
그대 보러 가는 길은
비가 먼저 마중 나옵니다.
땜 물만큼 큰 그리움들이
차 속 가득 숨죽이고 창밖을 내다봅니다.
유리창은 더 세게 흐느낍니다.
땜 속에 발목 잠그고
서서 죽은 감나무 가지에
때까치 한 마리 꽁지 들썩이며 빗속에서 서럽게 웁니다.
물 밑에 함께 가라앉은 아이들 웃음소리가 파문처럼 번집니다.
이 집 저 집 경계 없이 울타리 타고 다니던 넝쿨 콩
장독 옆에 피고 지던 봉숭아
당산나무 밑 돗자리 위에 몰아치던 가난과 폭염까지
모두 물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저 물 속 어딘가에
호호 입김 만들어 남루한 유리창 닦던 날과
수박서리 한 친구들 된서리 맞던 날과
뎅그렁 창창 부부싸움 하던 날과
알몸 부딪히며 살다간 이들의 땀에 절은 날짜들이
폭설에 갇혀 가슴 시린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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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발 속에 노오란 달이 뜨면
저자거리 한 쪽
“왕대포 잔술도 팝니다.”
삐뚤삐뚤 써있는 글씨가 벽을 타고 취한 듯 흘러내린다.
주모가 빈대떡을 뒤집고 있다.
그 속으로 그녀의 시간이 타들어 간다.
오만 색깔의 시간들이 훨훨 타고 있다.
구석에 놓인 술항아리 속에는
술꽃들이 활짝 피어 술렁거리고 있다.
꽃 속에는 수 만 갈래의 길이 있어
나는 이따금 그 속을 헤맨다.
신트림이 올라오고 입에서 단내가 나고
막사발 속에 노오란 달이 뜨면
꽃 속 길이 환하다.
그 속에서 젊은 어머니가 누룩을 빚고 있다.
주먹밥을 들고 나를 부른다.
나 뒷걸음질친다.
달 속으로 사라진다.
달콤한 술맛이 사슬처럼 나를 묶고
잃어버린 시간들이 사슬 속에서 꿈틀거릴 때면
발이 자꾸 헛디뎌지고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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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속으로 경운기 한 대가
―귀울림에 대하여
왔다.
아주 오래 전에 내 귓속에 살다간 그가
다시 찾아와 울기 시작한다.
귀―뚤, 귀―뚤, 소리가 머리 속을 헤집고 돌아다닌다.
눈앞이 흐릿흐릿 하다.
그의 울음소리는 내 귀를 깊은 항아리 속에 집어넣는다.
또 한 마리가 들어와 시끄럽게 운다.
아직, 견딜 만 하다.
머리를 흔들어 쫓아 본다.
귓바퀴를 움켜쥐고 떨어지지 않는다.
먼젓 놈이 경운기를 밀고 들어온다.
딸딸딸딸……
귓속으로 경운기 한대가 막무가내 들어온다.
나중 놈이 놀라 도망간다.
머리가 욱신욱신 쑤신다.
겨, 경운기가, 와, 와, 와……
내가 소리치려는데
경운기 바퀴가 내 소리를 우악스레 감고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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