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06년〈시와시학〉 포엠토피아 신인상 당선작

문근영 2014. 11. 12. 08:13

2006년〈시와시학〉 포엠토피아 신인상 당선작

당선작 : 김영선, 박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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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감을 먹으며 외 4편

김 영 선


평소 성격이 과격하고 모가 나
둥근 것을 보면 참지를 못 한다
몸 속 가장 무력한 칼 한 자루를
꺼내 배를 그어 가죽을 벗기고
혈을 물어뜯고서야 직성이 풀리니

세상의 모든 과일은
둥글다
열매가 둥근 까닭은 멀리
구르고 굴러 바로 턱 아래
형제간의 골육상잔을
피하기 위한 절체절명
어미의 배려이다
사십이 넘어도 속절없이 나는
어미 품으로 파고들고 내 어미도
아직 나를 놓으려 하지 않고
참으로 질기고도 질긴
골육상잔이다

단감을 먹는다
비로소 나는 둥글어 지기 시작한다
성질 급한 머리끝에서 가시밭길 발끝까지
급기야 어미는 내 입 속에서
열매가 된다 둥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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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번호


나는 조작 당하고 있다

벨소리가 반복적으로
울릴 때마다
두 귀를 쫑긋거리며
딩동 거리는 소리에
번호표를 들고 창구 앞에 서자
'여기는 KB 우대 고객 창구입니다’
'다른 창구를 이용해 주세요’
그날 이후로 나는
거리의 자동차 경적음에도
침을 흘린다

파블로프!
치사하다
먹는 것을 같고 장난을 치다니
당신의 실험이 증명된 이후
사람도 두들기면
개와 같이 된다는
세뇌기술이 범람하는 것을
아는가!

국민은행 구월동 지점
그곳에서 나는 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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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극


전동차 출입문 앞
벌어진 18센티미터를
넘어서자
진동을 즐기는 연인 하나 둘
(저들은 분명 중심을 탐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중심은 명백한고로 저들의 행위도 명백하다 중심에서 중심으로 순간)

차창 밖 폐허가 된 건설현장
누구의 기둥도 되지 못하고
뒹구는 둥근 중심 하나
울퉁불퉁 녹이 슬어 붉게 타오른다
흔들려도 흔들려도
솟구쳐 오르지 못하는 나는
축 처진 10센티미터의
자벌레가 되어 바닥을 긴다

전동차를 타고 가면서 나는
나를 기억한다
이젠 볼 장 다 본 왕년의 18센티미터를
그러고 보니 전동차는 나의 간극을
되살리는 잘 고안된 성인용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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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


동백 꽃 모가지

툭.

사유의 등불 한 점

매섭게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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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가면 내 안의 그 많았던 여자들이 있다


金이 朴을 만났을 때
고유의 형질은 반으로 낮추어졌다
金朴 아니면 朴金이라 불리어지지 않고
다시 김으로 명명되었다
동학년 이후에 李가 더해져
오리무중 길을 잃더니
동란 피난처 처마 밑 움집살이에
崔가 합류한 이후
아버지, 태조는 악몽에 휘달릴 때마다
목조 익조도 도조 환조도 조작하곤 했다
피는 묽어지기만 하는데
내 앞을 다투어 흘러온 혈들은
康의 바다에 들어 뿔뿔이 흩어 졌다

나는 분명 제로로 수렴되고 있다
나의 性은 사라지고 있다
여자라는 드넓은 바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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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선 1960년 경기도 강화 출생. 공인노무사. 현재 노무법인 경영안전 대표.



치타에 관한 생각 외 4편

박 일 규



그 누구보다 가장 빨리 달려야만 하기에 결코 기다리는 법이 없다. 그의 생을 단숨에 깨뜨려버리려고 시간은 벼랑이 되어 자꾸만 다가서지만 닿아야 할 지평선은 언제나 멀기만 하다. 이따금 날카로운 이빨이 지상에 피를 뿌리는 것은 다만 한 끼의 식사를 위한 것일 뿐, 새끼들보다 이웃들보다 늘 한발 빠르게 달리느라 사무치는 그리움의 속도로 제 그림자가 찢기는 줄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린다.

단지 사느냐 죽느냐가 있을 뿐이기에 저렇게 인정사정없이 달리기만 하는 짐승. 잠시 쉬어 갈 신호등도 못 본 척 들꽃이나 푸른 풀이파리들이 보내는 눈웃음도 뿌리치며 저보다 빨리 달리는 것들만 손에 넣으려고 향기로운 시간 한번 붙잡아 본 적 없는 아버지, 이젠 껍질만 남아 있는 그가 달려가고 있다. 콘크리트 벽이 막아서는 도시 한가운데서 혓바닥 길게 늘어뜨린 채 아직도 거친 숨결로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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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상사를 꿈꾸며



깊은 밤 참다랗게 밝히고 싶어
스위치를 올리자
어지간히 기운이 진했던지
버언쩍! 파딱!
60촉 알전구에서 전깃불이 나가버린다
어쩌겠는가
당신과 나. 갈 길은 막히고
금지된 정분이란 서러운 것이어서
함께 타오를 수 있는 한 오백 년이 없어서
캄캄함은 또 산장의 어둠까지 삼켜버린다
주룩주룩 빗줄기는 끊일 줄 모르는데
와락 그대를 끌어안은
내 마음 오직 벽력치는 절벽에 파닥거려
후줄근히 젖어버린다
어느 조난객이든 문 흔들지 마라
흙탕에서 겨우 건져낸 여린 시 한 구절에
뜨거운 숨넘어가며 화안한
이, 암전(暗電)!의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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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



저 드높은 하늘엔들
어찌 부끄럼이 없겠는가

우주의 맑고 짙푸른
그곳을 위해

비데의 물줄기가
분연히 치솟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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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



누구신가
가로누운 내 뼈를 표백시키며
언제나 주위를 맴돌기만 하다가
마지막
티끌 하나로 남은
나를 이다지 뒤척이게 하는
바람,

그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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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달



겨울 하늘이 쏟아낸

차고 흰 배설물의 무게에 무너지는
지상 내려다보며

숨이 막히는 듯
아예 눈을 감아버리려는지

속눈썹만
파르르르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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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규 전북 부안 출생. (주)해초동산 대표.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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