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문학과창작〉 작품상
숨은 얼굴 (외 1편)
고명수
목숨의 팔만대장경 어디엔가
숨겨진 얼굴이 있다
문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얼굴,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있다
행복한 순간에만 살짝 나타나는 얼굴이 있다
삶의 그늘, 찌든 계곡 속에 숨어 있다가,
해맑은 웃음 사이로 잠깐 나타났다가는
가뭇없이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얼의 모습
사진관에 가서 여러 컷을 찍어 보아도
그 얼굴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사진이란 사람을 온전히 보일 수가 없는 법,
찰나로 변해가는 어느 지점에 셔터를 누를 것인가
적중의 플래시를 터뜨릴 것인가
칠백만 화소는커녕
천만 화소를 잡아낸다는
최첨단 카메라로도 안 잡히는 얼굴,
사람의 참 얼굴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인가
앨범 속 어느 갈피에선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얼굴,
흐린 눈으로는 도무지 잡히지 않는 얼굴,
초고속 디지털 카메라로도 잡을 수가 없는,
사람에게는 술래처럼 꽁꽁 숨은 얼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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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냉이
폭풍한설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 냉이는 자란다
낙엽과 지푸라기 아래 숨어 봄을 기다리는 냉이,
행여 들킬세라 등 돌리고 있는 냉이를
장모님은 귀신처럼 찾아내신다
검불을 뜯어내고 흙을 씻어내고
정갈하게 씻어 바구니에 담아 둔 냉이,
그 귀한 걸 몽땅 다 비닐주머니에 담아주신다
봄 내음이 나는 냉이국을 먹으며
낙엽과 지푸라기 속에서도 목숨을 지켜
마침내 싹을 틔워낸 냉이를 생각한다
삶이란 살얼음판 위를 가는 길이어서
잠시라도 넋을 놓아서는 안 된다
가파른 벼랑을 조심조심 걸으며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봄을 기다리는 냉이를 보라
두 눈에 다(多)초점 압축 코팅렌즈를 낄망정
시퍼런 눈으로 찾아야 하리라
온 세상 다 밝힐 한 마디 말씀을,
겨울 냉이가 자신을 이기듯이
몰래 숨어 자란 냉이가
시원한 된장 국물이 되듯이
우리도 누구에겐가 시원한
국물이 되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소수서원 돌담길 옆에도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길섶에도 숨어 있을 냉이,
총알처럼 난사하는 얼음덩이 밑에서도,
안면근육을 마비시키는 말도 식음도 불가능케 하는 혹한,
온 시야를 앗아가는 강풍, 강설 속에서도,
청빙(淸氷)을 뚫고
겨울 냉이는 자란다
아니 자라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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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수 1957년 경북 상주 출생. 1992년 〈현대시〉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마스터키』『금시조를 찾아서』『내 생의 이파리는 브리스틀 콘 소나무 가지 끝에 걸려 있다』 현재 동원대학 미디어창작과 교수. 〈창작21〉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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