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신인들
―〈문예연구〉2006 여름호에서
텃밭
김은순
밤새 수런대는 소리 수상타
아침 일찍 텃밭으로 나가니
오오, 이런 호박넝쿨
아무 거침없이 내달리던 자리
떠억 가로막고 있는
옥수수 고추 상추 대
호박넝쿨 단단히 화가 났다
냅다 뻗어 앞 뒤 볼 것 없이
옥수숫대 휘어 감고
고추 대 돌돌 말아 움켜쥐자
호박넝쿨 따라 잡으려는지
덜렁이며 커가는 새파란 고추
씨앗 잔뜩 품어
누렇게 뜬 상추 대
머리끄덩이 한 움큼 잡혀 뒤흔들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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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순 1950년 충남 금산 출생. 한남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재학중.
전주이씨화수각(全州李氏花樹閣)
―덕암리
이경진
햇살이 느릿느릿 돌계단을 오르고 있다
장난기 많은 꼬마바람이 갈기를 잡아채도
돌사자는 무료하게 하품만 하고
가끔 처마 밑의 목소리로 나른한 시간을 흔들어도
시렁에 촘촘히 쳐 있는 세월의 거미줄을
걷을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그저 배롱나무들의 끊임없는 하혈이
계절을 짐작게 할 뿐
이상하게도 모든 게 느리기만 했다
스님이 내온 차 한 잔을 마시자
잰걸음으로 내 삶을 끌고 다녔던
슬픔이랄지 아픔 같은 것이
잠시 맑아지는 것 같다
나는 너무 급하게 사랑했고
너무 빨리 절망했던가 보다
아무 말 없이 찻물을 우려내던 손길이
죽비처럼 아프던 어느 여름날
햇살이 나보다 더 천천히
돌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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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진 1968년 출생. 전북대학교 경제과 졸업. 충남 서천문학회 사무국장.
그 집 앞
최호진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동네 남정네들 걸음이 느려졌다 속살도 벚꽃처럼 하얀 종냄이가 정짓간에서 허드렛물을 부시러 나오거나 뒷간에서 괴춤을 내리거나 꽃눈 아래 서서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로 출렁거리는 젖가슴이나 허벅지살을 흘려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씨 다른 자식들을 주렁주렁 달고도 두엄 같은 곳에서 잘도 산다고, 종냄이가 그 재주 하나는 좋은갑다고 남정네들은 발걸음을 늦춰가며 가래침을 삼키곤 했다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발걸음이 유난히 빨라지는 남정네가 하나 있었다 고자라고 소문난 용필이는 그 집 울타리 안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한밤중에 뛰어들어 캄캄하게 불붙은 용필이 부자지를 종냄이가 훑어버려서 그 길로 고자가 되었다는 둥, 애당초 제 구실도 못하는 부자지를 홧김에 종냄이가 훑어서 내쫓았다는 둥 말이 많았지마는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탱자나무 울타리에 기대어 바깥세상을 기웃거리는 호박넝쿨은 용필이가 서둘러 지나갈 때마다 너풀거리는 잎을 흔들며 쯔쯔쯧 혀 차는 소리를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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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진 1970년 전북 고창 출생. 우석대학교 국문과 졸업. 현재 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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