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눈발 날리는 마당
김운영
눈발 날리는 마당을
보고 있으면요
마른 저녁도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마는데요
발목 잃어버린 눈발은요
땅에 닿지도 못하구요
약한 한숨처럼 담벼락 위
아버지의 여윈 어깨 위
에도 말이지요 관절
절룩거리면서 아버지 뒤란으로
가시더니요 불쏘시개 송구나무
가마솥 물 끓이는데요
등겨같은 닭털이 공중에
몇 날아다녔나요?
오래오래 눈발이 아버지
빈 어깨에 배꽃처럼 쌓이면요
오래오래 가마솥 연기
마음의 暴政(장작불) 몸 밖으로
서서히 증발되고 있으면요
아버지 사발에 담아
안방에 어머니에게요
아버지 붉은 동맥 모세혈관 풀어
어머니에게 비는
견고한 용서
닭백숙의 용서를 말이지요
살과 뼈 허물어지는 解産처럼
맑은 국물 눈물 말이지요
어머니가 밤새 소리없이
우시는 날에는요 다음날
말없는 닭백숙 한 그릇
눈발 날리는 마당에서 말이지요.
<국제신문>
조각보를 짓다
이은규
그믐, 공명 쟁쟁한 방에 외할머니 앉아 있네요 오롯한 자태가 새색시처럼 아슴아슴 하네요 쉿, 그녀는 요즘하늘에 뜬 저것이 해이다냐 달이다냐, 세상이 가물가물 한다네요 오늘따라 총기까지 어린 눈빛, 오방색 반짇고리 옆에 끼고 앉아 환히 열린 그녀, 그 웃음자락에서 꽃술 향이 피어나기는 어찌 아니 피어날까요 시방 그녀는 한 땀 한 땀 시침질하며 生의 조각보를 짓고 있네요 허공 속에 자투리로 남아있을 어제의 어제들 살살 달래며, 그 옆에서 달뜬 호명을 기다렸을, 아직 色스러움이 서려있는 오늘의 오늘들을 공들여 덧대네요 때마침 그믐에 걸린 구름이 얼씨구 몸을 푸는데, 세상에서 제일 바쁜 마고할멈 절씨구 밤 마실 나왔나 봐요 인기척도 없이 들어와선 그녀 옆에 척하니, 그 큰 궁둥이를 들이대더라고요 그러더니 공든 조각보가 어찌 곱지 않으랴, 조각보에 공이 깃들면 집안에 복인들 왜 안 실리랴, 이러구러 밉지 않은 훈수를 두네요 마치 깨진 기와조각으로 옹송옹송 살림 차리던 소꿉친구 모양새로 앉아서는 말이지요 마고할멈의 넓은 오지랖이야 천지가 다 아는 일, 그 말씀 받아 모신 그녀는 손끝을 더욱 맵차게 다독이네요 한때 치자빛으로 터지던 환희들이 어울렁, 석류잇속 같이 아린 화상의 점점들이 더울렁, 쪽빛 머금은 서늘한 기원들까지 어울렁더울렁 바삐 감침질 되네요 生의 감칠맛을 더하던, 갖은 양념 같은 농지거리들도 착착 감기며 공글리기 되더니, 이내 그 色들色들 어우러져 빛의 시나위 휘몰아치네요 드디어, 우주를 찢고 한 장의 조각보가 첫 숨을 탔네요 금방이라도 선율 고운 장단이 들썩이며 펄럭일 것 같네요 저만치 아직 조각보에 실리지 않은 시간들은 羽化登仙이라 적힌 만장을 펄럭이며 서있네요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마고 할멈, 다 빠져버린 이빨 설겅설겅한 잇바디 내보이며 방짜유기빛으로 쨍하게 웃고요 외할머니야 그 조각보를 가슴에 안고 어린애처럼 좋아라, 술렁술렁 일렁일렁 거리네요 마침 장지문 밖에서 그믐달이 막 玄牝之門으로 드는 때 말이지요
<전북일보>
북어
기명숙
살점이 뭉텅 빠진 들쑥날쑥한 몸 하나 허공에 걸려있다
쾡한 눈알을 바람이 핥고 지나가자 파르르 눈가의 잔주름이 흔들린다 헤쳐가야 할 길을 또렷이 바라볼수록 굳은살처럼 딱딱한 몸은 야위어간다 그 해 누군가 억센 손으로 그의 내장을 파내고 그 속에 단단한 뼈대를 세웠다 그의 몸 바깥에서 느닷없이 아카시아꽃이 펑펑 지고, 군화자국이 지나간 자리마다 비늘 같이 꽃잎이 소복하게 쌓였다 바람 불어 허공이 저 혼자 우는 밤, 그는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뻣뻣해졌다
스물다섯 해, 맷집 하나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사는 북어가 있다 상한 지느러미 곧추세워 풍향계처럼 헤엄치려 하는데 아무도 그에게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우리 큰오빠……
떠나야 한다, 떠나야 한다 입술을 달싹이는데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매일신문>
우주물고기
- 미래과학그림展에서
강경보
미래의 어느 때에는
우리 살아갈 집이 달 옆에 있을 것이다
먼 지구의 일터로부터 귀가하는 일이
오늘 출퇴근하는 일 만큼이나 고되고 느린 것이 아니라
그냥 눈 한 번 쓱 감았다 뜨면
어느 사이 나는 우주정원의 앞마당에서 깨금발을 딛고
고층 빌딩 높이의 테라스를 지나 침실로 들어갈 것이다
은하수가 냇물처럼 반짝이며 별 사이를 흐르고
어린 시절 앞강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기억으로
가끔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고도 싶을 것이다 누군가
명왕성 뒤에 숨어서 우주적 망원렌즈로
얼음처럼 투명한 내 몸을 투사하기도 할 것이다
내 꿈은 비록 지금보다 육분지 오의 무게를 덜어낸
달에서 노니는 것이지만 그것은 촘촘하게 엮인
지구의 기억을 한 편 매달고 사는 일이 될 것이다
별과 별 사이에 빛의 길이 나고
택시는 허공을 날며 손님들을 태우고
어느 영화에서였지, 흰 천 조각으로 여인의 가슴과 음모를
붕대처럼 감으면 그대로 일상의 옷이 되는
그때는 사랑의 말도 한 번의 눈빛이면 되고
이별도 백만 광년 먼 별장에서 보내는
순간의 텔레파시면 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남아,
내 어항 속의 금붕어 한 마리가 어떻게
하늘을 날아 저 얼음별로 헤엄쳐 가는지
어느 날인가는 앞강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앉아
오래 당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처럼
마음에서만 사는 아득한 것들은 또 어떻게
저 별의 시간을 건너가게 되는지
<부산일보>
바뀐 신발
천종숙
잠시 벗어둔 신발을 신는 순간부터
남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낯설고 어색했다
분명 내 신발이었는데
걸을 때마다 길이 덜커덕거렸다
닳아있는 신발 뒤축에서
타인의 길이 읽혔다
똑같은 길을 놓고 누가
내 길을 신고 가버린 것이다
늘 직선으로 오가던 길에서
궤도를 이탈해 보지 않은 내 신발과
휘어진 비탈길이거나 빗물 고인 질펀한 길도
거침없이 걸었을 타인의 신발은
기울기부터 달랐다
삶의 질곡에 따라
길의 가파름과 평탄함이
신발의 각도를 달리 했던 것이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은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걷는 길,
나는 간신히 곡선을 직선으로 바꾸었다
<전남일보>
허공 위에 뜬 집
정동철
얼어죽은 새들을 주우러 강변에 나갔다
일찍이 우리가 접어 날린 종이비행기들
한 무리 되새 떼가 되어 이리저리 허공에 휩쓸리고 있었다
쩡쩡 얼어붙은 강은 속내 깊숙이
낡은 달력들을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빠르게,
추운 햇살 한 묶음 지나가던 동화 속의 집
왜 아버지는 거칠고 마른 삭정이만 골라
허공 위에 집을 지으셨을까
마루 밑에 놓인 신발들이 안쓰럽다며
어머니는 자꾸 창문 밖을 내다봤다
밥알 같은 눈발들이 지붕 낮은 집들을 지워버리는 동안
잠들 때마다 등을 쿡쿡 찔러대던
낡고 불편한 나뭇가지의 집
우리들의 하루는 종일 공중에 떠 있었다
귀 시린 겨울밤을 지우개로 지우며
연탄난로 위에 마른 건빵을 굽다가
갈라진 손등으로 벌건 연탄집게를 들어 글씨를 썼다
어디로 공처럼 튀어나갈 수도
굴러갈 수도 없었던 날들
사방연속무늬 벽면에서 철지난 통신표들이 노랗게 바래갔다
청색의 동치미국물을 마시며 우리는 조금씩 단단해져 갔지만
허공 위에 뜬 집에서는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
<무등일보>
李賀를 펼치다
오장근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서편에서 울던
갈가마귀 떼가 동편으로 분주했다 한 점,
멀리 갈대밭에서 사내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오랜 슬픔 같은 그의 아쟁이 등뒤에서 먹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한 번도 울지 않았던 그의 두 눈 속으로
노을이 설핏 지고 있었다 낯선 그의 발자국 소리로 하여
야트막한 강 언저리에서 몇몇 물고기들이
물밑으로 잠수하곤 하였다 미세하게 출렁이는 강물과 함께
그의 아쟁도 바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울고 있었다
그의 산발한 머리카락과 어깨를 잘 익은 어둠이 감싸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아쟁을 풀어 내렸다 어둠 속에서 아쟁만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아쟁의 가는 絃이 아주 낮게
동심원을 그리자 강물에 한 발을 담그고 있던
풀들이 춤을 추었다 갈대들이 불타올랐다
그의 모든 絃들이 몸을 놓아버렸을 때,
일곱 마리의 용들이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먹구름 속에서
마른번개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지상으로 일제히 꽂히고 있었다
동편에서 분주했던 갈가마귀 떼가
그의 앞에서 무작정 내려앉고 있었다 강물 깊숙이 잠수했던
물고기들이 차례차례 물길을 차고 오르며 수면으로
솟아올랐다 검은 絃 사이사이로 은빛 물고기들이 파닥거리며
수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광주일보>
전주철물점과 행복부동산 사이
정동철
우리철물점과 행복부동산 사이
그가 끼어 있다
손톱만한 햇살이 간신히 창에 비쳤다
사라질 때쯤이면 늘, 나는 그의 집을 지나친다
움켜쥔 칼끝으로 그가 새기고 싶은 것과
도려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가 칼끝으로 파낸 햇볕의 부스러기들은
결코 이름이 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이름 사이에 낀 것들을 도려내며 늙었다
그가 밖으로 나오는 법은 거의 없었다
조금씩 이빨이 자라는 설치류 꽉 다문 입 속,
엉거주춤 끼어 남의 이름을 도드라지게 새기다가
반복되는 자기 생까지 파내버릴 듯하였다
날마다 자신의 뭉툭한 손가락을 하나씩 빼내
손가락 끝에 아프게 지문을 새기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목도장을 하나 파러 갔다가 어느 날
나는 그의 뒤통수에 난 창문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잠깐, 둥근 보름달이었다가 그믐이 되기도 했다)
나뭇결 사이에 촘촘하게 어둠을 밀어 넣는 동안
달빛이 인주를 찍어 뒤통수에 도장을 박아 넣은 것이었다
<영남일보>
봉제동 삽화
김성철
천둥 번개가 치자 공장엔 정전이 찾아왔다
소나기의 망치질 소리가 시작되면
늙은 배선이 어김없이 누전 빙자한 어둠을 불렀다
여공들의 환한 치아가 깜빡깜빡 불 밝히고
재단사 김씨는 하늘위로 쌓아올려진
회색원단 눈길로 만지며 납품기일 손꼽는다
창틀 등지고 불어오는 바람
미싱 선반 위로 펼쳐진 꽃길 타고 달려간다
손 맞잡은 여공들 바람의 허리춤을 잡고
꽃길 위로 걸어 들어간다
피지 못한 꽃들이며 줄기 오르지 못한 실밥들이
보푸라기 흔들며 반긴다
페달 밟는 미싱공 꽃들에게 먼저 수인사 건네자
웃자란 실꽃들 서둘러 뿌리 걷으며
손에 핀 봉제선 위로 올라탄다
때묻은 손목, 손목들
산수유열매처럼 붉게 흔들린다
재봉중인 꽃술이 실밥을 흔들었으나
접근금지를 알리는 도안선이 유난히 날을 세운다
작업반장의 기침소리와 함께 기지개 다시 피는 형광등
주파수 맞추는 고물전축, 후후 바람 불어 목청 가다듬고
여공들은 와 하며
공장 안으로 퉁긴다
봉제동 수출공장
시동 거는 미싱들 서역 향한 길을 재촉한다
실크로드 사막의 모래처럼 날리는 보푸라기
봉제동 여공들은 실크로드를 걷고 있다
<대전일보>
금이 간 거울
정용화
얼어있던 호수에 금이 갔다
그 틈새로 햇빛이 기웃거리자
은비늘 하나가 반짝 빛났다
그 동안 얼음 속에서
은어 한 마리 살고 있었나보다
어둠에 익숙해진 지느러미
출구를 찾아 깊이를 알 수 없는
고요 속을 헤엄친다.
넓게 퍼져 가는 물무늬
한순간 세상이 출렁거린다
깊고 넓은 어둠 속에서
너를 지켜주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픔 속에서 반짝임이 나온다
반짝이는 모든 것은
오랜 어둠을 견뎌온 것이다
금이 간다는 것은
또 다른 세상으로의 통로다
깊이 잠들어 있는 호수 속에서
물살을 헤치고 길이 꿈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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