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엠포엠》 제1회 신인작품공모 당선작 - 조연수, 조경선, 곽지현
<1>-오후 두 시의 관음죽/조연수-
손가락이 자꾸 길어진다 길어진 손가락이 바닥에 떨어질 때 오후 두 시는 한없이 길어서 멈추어 선다 물렁한 살 위를 질척하게 옮겨 다니며 자는 잠이란 방처럼 늘 어두웠고 낡은 벽을 긁어대는 비명처럼 외로웠다 사타구니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미끈거리는 길, 핏물 젖은 손가락 그 물을 먹고 마디를 키운다 마디마디 맨살이 여자의 발목처럼 희고 오랜 관습은 손금처럼 새겨져 벽을 타오르고 있다 빽빽한 나무 그림이 흩어진다 후드득 새들이 날아오른다 움켜잡은 길들이 뻐근하다 손금 위로 잠든 시간이 먼지처럼 쌓이거나 흩어질 때 손가락이 자꾸 길어진다 멈춰진 오후 두 시가 몇 년 째 흐르고 있다
<2>-전의역으로 가는 길/조연수-
기차역 계단에 쭈쭈바를 빨며 모자를 눌러쓴 너는 혼자였어 손끝에 봉숭아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지만 알지 못했 지 손톱이 하얗게 비어 가는데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면 어쩌나 고민할 사이 없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 했어 기차가 들어 오는 플랫폼에서 상기된 얼굴로 올라타는 넌 발밑에 점점이 찍힌 붉은 자국을 보지 못했지 첫눈이 오는 전의역으로 간다 는 사실이 모든 걸 지워버렸거든 의자에 앉은 너는 하얗게 얼굴이 비어 가고 있었어
그곳에는 오래된 집이 있고 시계가 있고 낡은 종이인형에게 옷을 입히는 앙상한 손이 있지 하얀 목에 머플러를 두르고 멍든 무릎을 레이스 치마로 덮곤 했던 그 곳에는 낯선 새들이 가끔씩 머물곤 했어 새들이 날아올라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 겨울에도 붉은 봉숭아를 따곤 했지 손바닥이 가려워 살살 긁기도 했는데 어딘가 따끔거리게 하는 바늘이 있었는지도 몰라 지금도 어떤 밤에는 온 몸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아 그런 밤 너는 손톱을 자르고 타다닥 튀어 오르는 봉숭아 씨를 줍곤 하지
첫눈이 오는 전의역으로 가는 길 꿈에서조차 잊지 못하는 질척거리는 그 길 톡톡 떨어진 봉숭아 씨를 주우며 걷고 있지 허름한 침목을 건너 끝이 없는, <3>-나는 K가 아니다/조연수-
이것은 몸 안에 사는 상자 이야기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K는 등에 상자가 들어 있다고 했다 아니 상자가 아니라 적막함이라 했다 아니 적막함이 아니라 발톱을 감춘 토끼라 했다 마루 끝에 앉아 손톱을 다듬어주거나 매니큐어를 발라주던 노을 진 운동장에서 그네를 밀어 주던 K 그 저녁 내리던 빗줄기 그 빗줄기를 따라 후루룩 국수를 들이키던 소리 기찻길 위에 올려 진 녹슨 못 이야기를 하는 동안 상자는 조용했고, 조용했음으로 하루를 살아내던 날들이었다 어느 날은 담장 따라 걷는 채송화처럼 아무렇지 않게 하루하루 병풍이 되어도 좋았다 그렇게 나이 들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상자에게 말했다 상자는 고요했고 세상의 모든 새들은 서쪽으로 날아갔다 사는 게 지겨웠으며 빨리 늙고 싶다고 투명한 새를 보며 말했다 상자의 가슴팍쯤에 오줌 한줄기 갈겨주고 싶다는 생각은 한물간 생각이어서 세상 모든 날카로운 끝에 대고 너도 토끼냐라고 묻고 싶었다 발톱을 감춘 토끼라니, 그 하찮음이 오늘을 또 살게 하는지도 몰랐다 어떠한가, 하찮음으로 밥 먹던 날들 그네를 멈추는 것은 내 몸의 중심 거기에 상자가 있다 투명한 투명한 투명한 새는 왜 죽었을까 얼마나 살고 싶어야 투명해지는 걸까
<4>-웃는 뱀/조연수-
어느 해에는 둑 위를 물뱀들이 가로질러 지나가곤 했는데 바닥에 그려진 자국들을 까르르 웃음소리로 지워버렸지요 그 때마다 머리카락에 뱀꽃이 매달려 집으로 따라왔어요 뱀꽃은 우물 속에서 마루 아래 댓돌 밑에서 쑥쑥 자랐어요 발바닥이 가려워지면 누군가 내 등을 더듬고 손톱을 깎아주고 머리를 땋아주고 동산에 올라가고 그런 밤엔 습관처럼 요동치는 심장에 뱀꽃을 꺾어 비비대며 잠이 들었지요 지루하고 느리게 지나던 시간들 꿈에선 온몸을 끈적이는 혓바닥이 날름거려요 물뱀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웃을 수가 없어요 까르르 소리를 내려고 하면 겨드랑이로 사타구니로 물이 쏟아져 나와요
밤마다 뱀이 지나간 자리에 꽃이 폈어요 손등에 발목에 잘근잘근 피를 퍼 올려 파란 꽃을 피워대고 있어요 방죽에서 머리를 흔들던 뱀들은 자주 가슴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죠 비늘처럼 미끈거리는 가슴이 봉긋 아파오던 날의 휘파람처럼
<5>-NO 501610*/조연수-
일련번호로 불리는 내 이름 독일에서 태어나 한국을 온지 24년 윤기나는 내 몸 위를 달리던 수많은 손가락 콘서트 홀 가득 채우며 영롱하게 건반은 해머를 두드려댔다 내게도 팽팽하게 엮인 줄이 맑고 깊게 소리를 내던 시간이 있었다 광나게 앉아 누구와도 조율 하지 않았던
젊은 소리가 들어오면서 나는 리사이트홀로 분장실로 구석으로 창고로 자리가 옮겨졌다 나를 만지는 손이 없어지고 어쩌다 소리를 낼라 치면 묵직하고 탁하게 쏟아 질 뿐이다
겨우 스물네 살이 된 내가 마디가 꺾어지면서 짧고 저음의 소리를 내고 있다니 아직 연골은 괜찮아 사과를 딸 수 있다고 샹크 어셈블리도 견뎌 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누구도 오지 않는 닫힌 문 안으로 어둠뿐이다
어둠이 익숙해지자 비로소 떠오르는 덩그런 뼈마디 마디의 감각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오랜만에 숙면으로 빠져든다 하와이 해변 파도소리 들려온다 두두두 녹슬고 늘어진 스틸와이어를 끊는다 뜯겨진 해머와 건반이 떨어진다 가벼운 몸 하얀 아카시 핀 길을 달린다
*501610(일련번호). 1987년 독일 함부르크 스타인웨이사(社)에서 태어난 최고급 피아노
<<조연수 시인 약력>>
*경남 함안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과 과정수료
<<조경선>>
<1>-세 시 반의 알리바이/조경선-
세 시 반, 중앙 차선 너머 목을 길게 뺀 억새가 브레이크를 밟을 적마다 기우뚱 허리를 굽힌다
고라니, 억새 속에서 슬쩍 몸을 드러내고 뒤따르던 트럭 경적 소리에 밤알이 후두두 떨어진다
툇마루, 저 산 안쪽 마을을 보는데 백로와 고라니 올챙이와 연꽃을 놓고 토너먼트 시합을 한다
고라니, 연꽃 옆으로 슬쩍 지나간다 바람, 버드나무 잎들을 뒤집어 하얀 색을 만들더니 산 위로 날아간다
나, 텃밭에 박힌 돌을 후벼 파고 산과 집의 경계선 위에서 졸고 있다
세 시 반, 목 잘려나간 연꽃이 파란 하늘을 씹어 먹고 있다
<2>-샐러리 맨/조경선-
어느 날부터 내 몸이 줄어들고 있어요
줄어든 만큼 퉁퉁 붇기도 하지요 식물성 기름, 가성소다와 물이 합쳐져 모나지 않게 세상에 나왔지요 잠깐 잠깐 물에 빠뜨리는 것은 괜찮지만 바닥에 던지면 뭉그러져 버릴지 몰라요 하루 사용량은 정해져 있지 않아요
혹, 도망 못 가게 묶어놓는다 해도 며칠쯤은 견디리라 생각 합니다 가끔 거품을 물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사용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느닷없이 싹뚝, 절반으로 잘라 사용하는 것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3>-봄밤/조경선-
새벽에 불어 닥친 폭풍우 처마 밑에 달아 놓은 풍경을 끊고 낡은 철 대문을 후벼 파고
몹쓸 바람의 수작이 시작되었다 대추나무 부러뜨리지 마라 물오른 버드나무 뒤흔들어도 목련꽃을 건드리지 마라 전기 줄에 비 피하는 비둘기 쫓지 마라 마른 잔디 물 준다고 뿌리 들추지 마라
아침이 왔다
마당을 휩쓸고 간 바람의 흔적
검둥개 한 마리 밤새 짖더니 햇빛에 등을 내주고 졸린 눈이다
<4>-징/조경선-
멍석을 만드는 아버지 손은 언제나 점에서 시작합니다 점은 빙빙 돌아 지푸라기로 풀려나갑니다
물 한 모금 입에 물어 볏짚에 확, 뿜으면 볏짚은 스스로 숨을 죽이고 외길 마디마디 멍석의 눈이 됩니다
한 평생 양손 비벼 날실 새끼줄 꼬면 손에 땀이 말라 손가락 지문이 닳고 멍석의 씨실 바퀴는 여덟팔자로 칠십 줄이 새겨집니다
오늘밤 아버지의 멍석 위에 누워 봅니다 닳아버린 지문이 울먹울먹 여울지며 내 가슴을 휘감아 돕니다
<5>-삽/조경선-
비 쏟아진 날 아버지는 삽을 들고 논으로 간다
이산포에서 들어온 샛강의 물살이 나와 잉어를 밀어 놓으며 논바닥을 휩쓸고 곤두박질친다
아버지는 들고 있던 삽으로 물위를 탁, 내리친다
잉어 한 마리 수면 위로 떠오르며 놀란 것인지 삽자루에 맞은 것인지 비틀거린다
“이놈아 망설이지 말고 빨리 건져 올려라” 나는 재빨리 잉어를 논두렁 위로 저녁 밥상 위로 올려놓는다
지금, 모서리 깨진 삽 한 자루 문지방에 기대 저무는 아버지를 지키고 있다
<<조경선 시인 약력>>
*1961년 경기도 고양시 출생. *경희대학교 행정학과 석사 졸업
<<곽지현>>
<1>- 견고한 고독-벨린조나를 위해/곽지현-
천년의 시간을 끌어안은 무수한 성의 장벽 이 밤, 아무도 오지 않는 성 주위를 돈다 긴 나날 기다림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되었을까
아가, 이제 그만 외로워해라 네가 가만있어도 세계에서 말발굽 소리를 끌고 올 테니까 네가 성이라는 것만으로도 좋아할 테니까 만인이 네 이름을 부를 것이다 우리나라 탑들엔 전설이 많지 아사녀와 아사달도 있지
아가, 이제 더 사랑받게 될 거야 많은 영혼들이 네 앞에서 사랑을 맹세하고 기념사진을 찍을 거야
아가, 무너지지 않으려고 갇혀있는 곳에서 이제 숨을 쉬어보렴 아무도 없는 자정에는 혼자 울어도 된단다 천형을 앓다 지상으로 내려온 천사의 날개로.
<2>-심장이 없다/곽지현-
샐러드가 차려진 칙칙한 자취방 여린 친구는 떠난 사람을 주절주절 씹어대며 심장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그녀가 입을 벌릴 때마다 쌉싸래한 샐러드 향이 콧속으로 들어온다 심장이 없다……. 시간이 지나 사람을 알고 사랑을 하며 알았다 왜 심장이 없어지는 것인지. 끊길 듯 말듯 주문을 거는 심장의 허기 극도의 단말마처럼 예민한 촉수를 갈아 고통에서 살아남으면 변종 인간이 된다는 것을 그것은, 심장이 없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하얀 접시에 포크가 나란히 콕,콕,콕 마음의 쉼표가 돋아나온다 그리움과 배합된 샐러드 달콤한 향을 흘리며 아삭아삭 씹힌다 헤어지고 꼭꼭 씹어야 되는 샐러드 허기 속에 파릇하게 돋아나오는 눈물
<3>-곤줄박이/곽지현-
박새 과에 속하는 몸길이 14cm의 명금류 머리는 크림색이다. 울음소리는 ‘씨이, 씨이, 씨이’하는 경계의 소리와 ‘쓰쓰 삐 삐 삐’ 작은 소리를 풀어낸다. 지저귈 때는 ‘쓰쓰삥, 쓰쓰삥’ 또는 ‘쓰쓰 삐이삐, 쓰쓰 삐이삐’ 고개를 들고 눈빛 곱다 외 길 위에서 흐릿하게 대로를 바라본다 귀에서 이명이 들리고 정신이 혼미한 것은 강렬한 햇빛에 기가 질렸기 때문이다 ‘복시인가?’ 아지랑이가 보였다. 조금 후 내가 떨어뜨린 귀걸이가 오토바이에 깔려 튄다 반짝반짝한 빛을 반사하는 것이 보인다 가까스로 길을 걸어왔다. 귀걸이 한쪽은 내 귀에 있고 나머지 한쪽의 비명을 외면했다 길 위에 나도 오토바이에 깔려 반짝 빛날 것 같았다 곤줄박이, 외줄박이, 곤두박질 그 새는 왜 곤줄박이일까 참새라는데, 친근하다는데, 두려움이 없다는데 오토바이에 깔려 빛날 것 같은 고개 쳐든 여린 몸
<4>-지난 연가/곽지현-
마주앉아 설렁탕을 먹는 눈이 오지 않은 겨울날 눈보다 깨끗한 여자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다고 너에게 설렁탕 국물 같은 뽀얀 입김을 호호 불었다 너는 오직 눈으로만 축하해 주었다 설렁탕국물은 말개졌다 일 년이 지나 우린 가로등이 지켜선 조용한 여학교에서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네 속에 찬 눈이 있는 것을 보았다 다이아몬드를 조각내는 유리가루가 있는 것을 보았다 찻집 통유리 안으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을 때 너는 내 옆얼굴 앞, 유리창에 노크를 했다 ‘라흐마니노흐’가 흐르는 아침은 무거웠다 다시 설렁탕을 먹으려했던 너와 나 발자국 사이로 작은 길이 생겼다 눈이 오지 않은 겨울날 빛나는 유리가루 속에 우리의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5>-아직도 달그락거리는 작은 껍질/곽지현-
굉음과 함께 날카로운 쇠붙이들이 내 입안을 누빌 때 두려움에 떨며 견뎠다. 의사는 마음대로 입안을 뜯긴 다섯 살짜리가 잘 참는다며 돈을 지불하는 엄마에게 칭찬했다 성년이 되는 동안 부당한 대우들을 참는 시간이 길어졌다 사랑도 참으며 작은 껍질 속에서 혼자 살았다 아픈 이빨은 아직도 달그락 거리지만 여전히 참을성에 갇혀버려 영혼이 타들어갈 때까지 소리 내지 못하는 나에게 필요한 건 의사가 아닌 참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 줄 따뜻한 마음이었다 세상을 향해 자연스럽게 달그락거리는 작은 용기였다.
<<곽지현 시인 약력>>
*1975년 서울 출생. *1998년 상명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연세대학교 본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석사 200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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