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노는 숲-1
-우울의 포지션
진란
삶은 되돌이표가 없는데
나는 자꾸 되돌이표처럼 되돌아오고 되돌아가고
되돌이표를 자꾸만 물위에 띄워놓는다
앙금으로 가라앉은 것들이 부유되어 올 때까지
몽니를 부리듯 그 자리에 자꾸 되돌아가서는
날아가는 것들을 부러워하고
헤엄치는 것들을 샘내고
피어나는 것들을 기뻐하고
지는 것들에 대하여 경외하면서
내 몸이 땅 위로 부유하는 것이 더 쉬울 것만 같은
그런 기다림이 홀가분해 보이는 숲, 속에서 나는 왕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보는 재미
네가 없을 때 슬쩍 훔쳐보는 관능
그래보아도 되돌아오는 것은 없는데
애써보아도 되돌아가는 것도 없는데
어쩌자고, 난이도 낮은 이 곳에 앉아 기다리느뇨
그럼에도, 난이도 없는 저 곳애 서서 서성이느뇨
개망초. 2
진란
묻어야 할 것이 얼마나 많길래
망초라 했을까
무심한 꽃대들의 손짓 너머로
실족한 남자가 휘뚝휘뚝 걸어간다
어쩔 수 없었던 허방
마음껏 뻗을 수 없었던 걸음이 주춤거린다
남루한 목숨으로 모질게 남아
묵정지에 와서는 망부가 忘婦歌로 피는구나
한때는 젊음과 열정의 카르페디엠,
치열하던 노선도 놓아버리고
서울역 광장이며 지하에 피어난 무심한 꽃들
어쩌면 우리네 남편이었을
아니, 우리 아이들의 아비였을
저 하얀 소금꽃
지천으로 피어나는 백귀白鬼들
저녁의 시
진란
꽃을 많이 보고 들어온 날
발바닥과 무릎과 종아리, 목과 등과 팔뚝이 쑤시고 아파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귀인을 만난 날이라
심장까지 저미지 않는다
사람을 많이 보고 들어온 날
쓸 말은 하나도 없이 쓸모없이 주절거려 쓸쓸하다
사람꽃은 스치는 바람결 같아도 상처를 남긴다
말 없이도 웃고 속없이도 실컷 웃고
입술 끝이 귀에 걸리게 웃고 들어온 날
내 뒤를 따라 들어와 끝내 울게 하는 것은
사람꽃 속에 함께 있던 바로 나, 내 그림자들이다
행여 지나치는 말로 과하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직설화법으로 말 한다며
깊이 박히는 비수를 꽃지 않았을까
내가 받은 비수를 뽑아내면서 어쩐지 나는
다음 생에는 꽃으로 태어나졌으면 싶은 것이다
사람꽃을 본다는 일
꽃과 꽃 사이에서 질서를 지킨다는 일
말하자면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지 않고
잘 지켜주면서도 서로 행복해지는 일
시퍼런 갈기를 휘날리면서 달려오는 무법자같은 말
향방없이 달려왔다가 달려갔다가
봄햇살처럼 뜨겁기도 하다
네가 나를 무시하면 그래 나도 너를 무시하면 된다
혼자 노는 숲의 독백이 깊어지는 시간
꽃과 사람꽃 숲의 길 잃지 않도록 귀 열어 두는 일
홀로 피어나고 홀로 나부끼고 홀로 버티는 일
바람은 내 안 중심부터 소소하게 흔들리더니
꽃바람으로 날아가기도 하고
회오리바람으로 몰아치기도 하고
내 귀가 바람의 중심이었다는, 그런 저녁이다
출처:나무아래서//혼자노는 숲// 진 란 시집
ps: 진 란 님의 시집 전체를 정독하며.. 6독을 살펴 내려가던 중에
마음에 와 닿는 시 3편을 기록으로 남기는 오늘 새벽이다.
부디, 진 란 시인께서 시와 함께 걷는 이 길이 아름다운 동행이 되고 시간이 되며,희망의 노레
가 되기를 바라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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