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령 났다
김연성
그는 종이인생이었다 어느 날
흰 종이 한 장 바람에 휩쓸려 가듯 그 또한
종이 한 장 받아들면 자주 낯선 곳으로 가야 했다
적응이란 얼마나 무서운 비명인가
타협이란 또 얼마나 힘든 악수이던가
더 이상 아무도 그를 읽지 못할 것이다
얇은 종잇장으로는 어떤 용기도 가늠할 수 없는데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읽는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이다
그 골목의 정체 없는 어둠이다
그는 늘 새로운 임지로 갈 때마다 이런 각오했다
"타협이 원칙이다
그러나 원칙을 타협하면 안 된다"
나일 먹을수록
이 세상에선 더 이상 쓸모없다고
누군가 자꾸 저 세상으로 발령 낼 것 같다
막다른 골목에서 그는,
원칙까지도 타협하면서 살아온 것은 아닌지
허리까지 휘어진 어둠 속에서
꺼억꺼억 토할지 모른다
모든 과거는 발령 났다 갑자기,
먼 미래까지 발령날지 모른다
시간은 자정 지난 새벽 1시,
골목 끝에 잠복해 있던
검은 바람이 불쑥 낯선 그림자를 덮친다
-시집『발령났다』(천년의시작, 2011)
출처 : 시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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