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이 홍 섭
아이가
힘겹게 뒤집기를 시작하면서
이 철없는 세상을 용서하기로 했다
마흔 넘어 찾아온 아이가
외로 자기 시작하면서
이 외로운 세상을 용서하기로 했다
바람에 뒤집히는 감잎 한 장
엉덩이를 치켜들고 전진하는 애벌레 한 마리도
여기 이 세상의 어여쁜 주인이시다
힘겹고, 외로워도
가야 하는 세상이 저기에 있다
멀미
어머니와 함께
아흔아홉 굽이 대관령 넘어 친척 집으로 가는 길
휘청거리는 버스 안에서
젊은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자꾸 말을 시키셨다
말 좀 해볼래
말 좀 해볼래
그러다보면
어느덧 버스는 대관령을 넘고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잠이 드시곤 했다
일흔 넘으시며
어디 한 군데 몸 성한 곳 없는
늙으신 어머니
삶은 굽이굽이 멀미 같은 것이어서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건네야 하는 것인데
말 좀 해볼래
말 좀 해볼래
조르던 어머니께서는
이제 말이 없으시다
- 이홍섭 시집 『터미널』(문학동네, 2011. 7)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꽃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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