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트레이싱 페이퍼 / 김윤이

문근영 2008. 11. 5. 09:08

트레이싱 페이퍼 
                   
                                김윤이



잘 마른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네 나를 읽네
몇 장 겹쳐도 한 장의 생시 같은,
서늘한 바람 뒤편
달처럼 떠오른 내가 텅 빈 아가리 벌리네
지루한 긴긴 꿈을 들여다봐주지 않아 어둠이 흐느끼는 밤
백태처럼 달무리 지네
일순간 소낙비
가로수 이파리, 눈꺼풀이 축축하게 부풀어 오르고
거리마다 지렁이가 흘러넘치네
아아 무서워 무서워
깨어진 잠처럼 튀어 오른 보도블록,
불거져 나온 나무뿌리
갈라진 혓바닥이 배배 꼬이네
비명이 목젖에 달라붙어 꿈틀대네
나는 이 길이 맞을까 저 길이 맞을까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고 싶지만
손금이 보이지 않는 손
금 밟지 않기 놀이하듯 두 다리가 버둥대네
두 동강난 지렁이 이리저리 기어가고
구름을 찢고 나온 투명한 달
내 그림자는 여태토록 나를 베끼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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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붕어가 헤엄치는 골목

 

  붉은 지느러미처럼 천막이 펄럭이는 리어카에서

  노글노글한 반죽 치대는 부부

  싱싱한 붕어를 물어 올리고 있다

  뱃속 가득, 통통하게 팥알 밴 것들

  건져내기 무섭게 봉투에 담긴다

  비스듬함 둔덕에서도 참붕어는

  오촉 백열등을 집어등 삼아 우우 몰리고 있다

  은근히 구워진 틀을 지나

  발깍거리는 어망을 닫고서야

  불의 물살이 원반처럼 돌아간다

  서로 곁고 눌려 훈훈한 입김 뻐금대고

  녹진한 열기로 몸을 덥힌다

  새까만 빵틀 속 붕어가

  겨울 밤 서서히 익어갈 때

  불빛에 홀려 건져 올려지는 것들,

  골목에 한 봉지씩 따뜻한 물길이 튼다

  가끔식 손을 비비다가 서로의 손을 맞잡는

  붕어빵 부부 손마디마다 입질로 달궈진 손끝이 빨갛다

  고른 철망에 받쳐져 몸을 뒤척이는 참붕어,

  골목으로 헤엄치기 위해 겨우내 산란중이다

 

  <2003년 포엠큐 사이버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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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꽃이 필 때

 

   목욕탕 안  노파 둘이

   서로의 머리에 염색을 해준다

   솔이 닳은 칫솔로 약을 묻힐 때

   백발이 윤기로 물들어간다

   모락모락 머릿속에서 훈김 오르고

   굽은 등허리가 뽀얀 유리알처럼

   맺힌 물방울 툭툭 떨군다

   허옇게 세어가는 등꽃의

   성긴 줄기 끝,

   지상의 모든 꽃잎

   귀밑머리처럼 붉어진다

   염색을 끝내고 졸음에 겨운 노파는

   환한 등꽃 내걸고 어디까지 갔을까

   헤싱헤싱한 꽃잎 머리올처럼 넘실대면

   새물내가 몸에 배어 코끝 아릿한 곳,

   어느새 자욱한 생을 건넜던가

   아랫도리까지

   겯고 내려가는 등걸 밑

   등꽃이 후두둑 핀다

 

 <2006년 윤동주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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