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 한 장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군가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데 있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 진다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어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지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히 으깨는 일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지,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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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깨진 연탄
- 안 도 현 -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은 것이다
나를 끝 닿는 데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 위에
지금은 인정머리없이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래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 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를
나도 느껴 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한지 손을 뻗어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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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가고 싶다
안도현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별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이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뜻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라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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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 / 안도현
도끼 한 자루를 샀다
눈썹이 잘 생긴 놈이다
이 놈을 마루 밑에 밀어 넣어두고 누웠더니 잠이 오지 않았다
나도 드디어 도끼를 가졌노라
세상을 명쾌하게 두 쪽으로 가를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살아가다 내 정수리에 번갯불 같은 도끼 날이 내려온다 해도 이제는 피하
지 않으리라, 생각하니
내 눈썹이 아프도록 행복하였다
장작을 패보겠다고
이튿날 새벽, 잠을 깨자마자 도끼를 찾았다
나무의 중심을 향해 내리치면 나무는 장작이 되고 장작은 불꽃이 되고 불
꽃은 혀가 되고 혀는 뜨거움이 되고 뜨거움은 애욕이 되고 애욕은 고독이 되고
그리하여 고독하게 나는 장작을 패다가 가리라 싶었다
도끼를 다를 줄 모르는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옛적 아버지처럼 손바닥에 침을 한 입 뱉고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양발을 벌린 다음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도끼를 치켜들고는
(허공으로 치켜올려진 도끼는
구름의 안부와 별들의 소풍 날짜를 잠깐 물어보았을 것이었다)
있는 힘을 다해 고요한 세상의 한가운데로
도끼를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내 도끼는
나무의 중심을 가르지 못하였다
장작을 패는 일은 번번이 빗나가는 사랑하는 일과 같아서
독기 없는 도끼는 나처럼 비틀거렸다
시집 - 너에게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2004년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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