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부사를 좋아하신다
나희덕
'쓰다'라는 동사의 맛이 항상 쓴 것은 아닙니다
'보다'라는 동사는 때로 조사나 부사가 되기도 합니다
'너무'라는 부사를 너무 좋아하지는 마세요
'빨리'라는 부사도 조심하세요
'항상'이라는 부사야말로 항상 주의해야 할 물건이지요
하느님이 부사를 좋아하시는 건 사실이지만요
양치기가 사제보다 더 숭고할 수 있는 건
바로 부사 때문이에요
양치기가 어떻게 양들을 불러 모았는지
그때 눈빛은 어땠는지
목소리는 얼마나 다정했는지
해질 무렵 어둠은 얼마나 천천히 걸어왔는지
양들이 한 마리도 빠짐없이 돌아왔는지
돌아오는 길에 데이지가 얼마나 많이 피어 있었는지
부사로 이루어진 그런 순간들 말이에요
부사는 희미한 그림자 같아서
부사 곁에서는 마음도 발소리를 낮춘답니다
'천천히'라는 부사는 얼마나 천천히 어두워지는지요
'처음'이나 '그저'라는 부사 뒤에서 망설이는 동사들을 보세요
동사들이 침묵하는 건 부사들 때문이에요
그러니 어떤 부사를 발음하기 전에는 오래오래 생각하세요
그런데 하느님, 부사를 좋아하시는 당신은 정작
내 속에서 길을 잃으셨군요
-2018년 모:든시 봄호.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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