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린 책
송종규
켜켜 햇빛이 차올라 저 나무는 완성되었을 것이다
꽃이 피는 순간을 고요히 지켜보던 어린 나방은 마침내 날개를 펴, 공중으로 날아올랐을 것이다
바스러질 듯 하얗게 삭은 세월이 우체국을 세워 올렸을 것이다
숲과 별빛과 물풀들의 기억으로 악어는 헤엄쳐 나가고 행성은 궤도를 그리며 우주를 비행했을 것이다
천만 잔의 독배를 마시고 저 책은 완성되었다
자, 이제 저 책을 펴자
잎사귀를 펼치듯 저 책을 펼치고 어깨를 구부리듯 저 책을 구기자
나무의 비린내와 꽃과 어린 나비가, 악어와 우체통이 꾸역꾸역 게워져 나오는 저 책
저 책을 심자
저녁의 우주가, 어두운 허공인 내게 환한 손을 가만히 넣어줄 때까지
- 현대시학. 2015년 3월호.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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