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에게 (외 2편)
홍신선
2월의 덕소(德沼) 근처에서
보았다 기슭으로 숨은 얼음과
햇볕들이 고픈 배를 마주 껴안고
보는 이 없다고
녹여 주며 같이 녹으며
얼다가
하나로 누런 잔등 하나로 잠기어
가라앉는 걸
입 닥치고 강 가운데서 빠져
죽는 걸
외돌토리 나뉘인 갈대들이
언저리를 둘러쳐서
그걸
외면하고 막아 주는
한가운데서
보았다
강물이 묵묵히 넓어지는 걸
사람이 사람에게 위안인 걸.
겨울섬
대교(大橋)를 건넜다 피난민 몇이 과거를 버린 채 살고 있다.
마을 밖에는
동체뿐인 새우젓 배들
빈 돛대 몇이 겨울 한기에 가까스로
등 받치고 기다리고.
물 빠진 갯고랑, 삭은 시간들 삭은 물에 이어져 잠겨 있다.
일직선, 버려진 마음들로 쌓아 올린 방파제까지
나문재나물들 줄지어 나가 있다
뻘에 두발* 내리고 붙어 있는 목에 힘준 저들
쓸리지 않으면
개흙으로 삭는 일
더러 쓸리면
닻으로 일생 내리는 저들의 일.
힘 힘 풀어 놓고
공판장 매표소 횟집들로 선착장에 힘 풀어 놓고
두어 걸음 비켜서서
말채나무 오그라든 두 손에
저보다 큰 겨울 하늘 든 채 있다
사는 일이 사는 일로 투명하게 보이고 있다.
———
* 두발: 원래는 ‘두 발’로 ‘두 다리’라는 뜻이지만 중의법도 가능함.
우연을 점찍다
사창굴이 따로 있는가 아파트 단지 뒷길 화단에
때늦은 쪽방만한 매화들 몸 활짝 열었다
무슨 내통이라도 하는지 앵벌이 한 마리 절뚝절뚝 한쪽 발 끌며
꽃에서 꽃으로 방에서 방으로 점, 점, 점 찍듯 들렸다 날아간다
날아가다 또 들른다
무저갱 같은 꽃들의 보지 속에서
반출 금지된 자손이라도 비사입(秘私入)하는가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 떠도는 널빤지 구멍 속으로
모가지 한 번 내미는 것이
목숨 점지되는 인연이라는데*
쪽방촌 성폭행범처럼 점점점 씨를 묻으며 드나드는 저 앵벌이 선택은
인연인가 우연인가
매화들 뭇 가지에서 가건물처럼 철거된 빈자리
곧 거북이 모가지만한 열매들 불쑥불쑥 내솟고
그즈음 앵벌이는 또 사창굴 여느 꽃의 곪아 터진 몸 찾아다니며
가장자리 나달나달 핀 종이쪽지 구걸 사연이라도 돌리는가
이 꽃의 음호 속에 저 꽃의 치골 위에
점, 점, 점 우연을 점찍는가
—시선집『사람이 사람에게』(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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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신선 / 1944년 경기도 화성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1965년 월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서벽당집』『겨울섬』『삶, 거듭 살아도』(시선집)『우리 이웃 사람들』『다시 고향에서』『황사 바람 속에서』『자화상을 위하여』『우연을 점찍다』『홍신선 시전집』『마음經』(연작시집)『삶의 옹이』등. 저서 『현실과 언어』『한국사와 불교적 상상력』외 다수. 동국대 문예창작과 교수 역임. 현재 계간《문학·선》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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