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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공광규 시집 『담장을 허물다』- 가죽그릇을 닦으며 외 2편

문근영 2018. 12. 20. 02:25

가죽그릇을 닦으며 (외 2편)

 

          공광규

 

 

 

여행 준비 없이 바닷가 민박에 들러

하룻밤 자고 난 아침

 

비누와 수건을 찾다가 없어서

퐁퐁으로 샤워를 하고 행주로 물기를 닦았다

 

몸에 행주질을 하면서

내 몸이 그릇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뼈와 피로 꽉 차 있는 가죽그릇

수십년 가계에 양식을 퍼 나르던 그릇

 

한때는 사람 하나를 오랫동안 담아두었던

1960년산 중고품 가죽그릇이다

 

흉터 많은 가죽에 묻은 손때와

쭈글쭈글한 주름을 구석구석 잘 닦아

 

아름다운 사람 하나를

오래오래 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수종사 뒤꼍에서

 

 

 

신갈나무 그늘 아래서 생강나무와 단풍나무 사이로

멀리서 오는 작은 강물과

작은 강물이 만나 흘러가는 큰 강물을 바라보았어요

서로 알 수 없는 곳에서 와서

몸을 합쳐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는 강물에

지나온 삶을 풀어놓다가

그만 똑! 똑! 나뭇잎에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지요

눈물에 반짝이며 가슴을 적시는 나뭇잎

눈물을 사랑해야지 눈물을 사랑해야지 다짐하며

수종사 뒤꼍을 내려오는데

누군가 부르는 것 같아서 뒤돌아보니

나무 밑동에 단정히 기대고 있는 시든 꽃다발

우리는 수목장한 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던 거였지요

먼 훗날 우리도 이곳으로 와서 나무가 되어요

나무그늘 아래서 누구라도 강물을 바라보게 해요

매일매일 강에 내리는 노을을 바라보고

해마다 푸른 잎에서 붉은 잎으로 지는 그늘이 되어

한번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는 삶을 바라보게 해요

 

 

 

 

 

 

 

재래식 변소에 쭈그려 앉아서

 

 

 

구린내에 삭아 구멍 난 양철문 틈으로

사람이 오나 안 오나 밖을 내다보니

늙은 느티나무에서 수다를 떨던 참새떼가

구기자나무에 가랑잎처럼 쏟아져내린다

참새들은 구기자꽃 빛을 닮은 어린 발로

꽃잎을 툭툭 털어대고 있다

멀리 뿔바위에서 뻐꾸기가 옛날처럼 운다

보리 베는 일이 고단하여 몸살을 앓고 난 뒤에

가출을 생각했던 옛날이 생각나

풋 하고 웃음이 터진다

누이들의 입술과 봉숭아 꽃물 들인 손톱이

다닥다닥 달라붙은 빨간 앵두나무 그늘

추녀에 매달린 양파들이 흙 묻은 맨얼굴을

어린 자매들처럼 부비고 있다

청태산에서 비구름이 오고 눈보라가 오고

철새가 날아가 석양에 박히던 옛날을 생각하는데

풍덩!

똥물이 튀어 엉덩이와 불알을 만진다

 

 

 

 

 

 

공광규 / 1960년 서울 출생. 1986년 《동서문학》신인상으로 등단. 시집『담장을 허물다』『말똥 한 덩이』『소주병』등.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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