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의 집(외 2편)
이규리
이승을 이별하고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그 49일간을 중음(中陰)이라 한다는데
그동안 혼백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곳을 떠돈다고,
누가 그들에게 그간
머물 곳을 마련하려 했을까
그리하여 투명한 집 하나 걸었던 건 아닐까
유리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곳이 떠올랐어
아득한 공중 유리의 집으로 가는 듯했어
이제 그 집으로 내 어머니 드시고
마흔 아흐렛날 동안
누가 밥상을 차리고 전기장판을 데워놓는지
4층이 9층에게 놀러가는 것처럼
범어동이 공산동으로 이사하는 것처럼
그러하시기를 간절히
49, 49 중얼거리다보니
49는 참 친근한 숫자라는 생각
그곳이 49번지는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아니라면, 우리가
먼 사람을 부를 때 왜 그리 허공을 보게 되는지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
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
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
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
아,
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
죄송해요
꼭 그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
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인 것을요
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인데
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
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
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
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공원 안에 있는 살구나무는 밤마다 흠씬 두들겨맞는다
이튿날 가보면 어린 가지들이 이리저리 부러져 있고
아직 익지도 않은 열매가 깨진 채 떨어져 있다
새파란 살구는 매실과 매우 흡사해
으슥한 밤에 나무를 때리는 사람이 많다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도 할 것이다
키 큰 내가 붙어다닐 때 죽자고 싫다던 언니는
그때 이미 두들겨맞은 게 아닐까
키가 그를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평생
언니를 때린 건 아닐까
살구나무가 언니처럼 무슨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매실나무도 제 딴에 이유를 남기지 않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한쪽은 아프고 다른 쪽은 미안했던 것
나중 먼 곳에서 어느 먼 곳에서 만나면
우리 인생처럼
그 나무가 나무를 서로 모르고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 2014)
이규리 / 1955년 경북 문경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4년《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앤디 워홀의 생각』『뒷모습』『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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