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이규리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유리의 집 외 2편

문근영 2018. 12. 20. 02:24

유리의 집(외 2편)

 

       이규리

 

 

이승을 이별하고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그 49일간을 중음(中陰)이라 한다는데

그동안 혼백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곳을 떠돈다고,

 

누가 그들에게 그간

머물 곳을 마련하려 했을까

그리하여 투명한 집 하나 걸었던 건 아닐까

 

유리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곳이 떠올랐어

아득한 공중 유리의 집으로 가는 듯했어

 

이제 그 집으로 내 어머니 드시고

 

마흔 아흐렛날 동안

누가 밥상을 차리고 전기장판을 데워놓는지

 

4층이 9층에게 놀러가는 것처럼

범어동이 공산동으로 이사하는 것처럼

그러하시기를 간절히

 

49, 49 중얼거리다보니

49는 참 친근한 숫자라는 생각

그곳이 49번지는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아니라면, 우리가

먼 사람을 부를 때 왜 그리 허공을 보게 되는지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

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

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

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

아,

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

 

죄송해요

꼭 그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

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인 것을요

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인데

 

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

 

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

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

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공원 안에 있는 살구나무는 밤마다 흠씬 두들겨맞는다

이튿날 가보면 어린 가지들이 이리저리 부러져 있고

아직 익지도 않은 열매가 깨진 채 떨어져 있다

새파란 살구는 매실과 매우 흡사해

으슥한 밤에 나무를 때리는 사람이 많다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도 할 것이다

키 큰 내가 붙어다닐 때 죽자고 싫다던 언니는

그때 이미 두들겨맞은 게 아닐까

키가 그를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평생

언니를 때린 건 아닐까

 

살구나무가 언니처럼 무슨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매실나무도 제 딴에 이유를 남기지 않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한쪽은 아프고 다른 쪽은 미안했던 것

나중 먼 곳에서 어느 먼 곳에서 만나면

우리 인생처럼

 

그 나무가 나무를 서로 모르고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 2014)

 

 

 

 

이규리 / 1955년 경북 문경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4년《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앤디 워홀의 생각』『뒷모습』『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