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공간 (외 2편)
안희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쓰면
눈앞에서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
한참을
서 있다 사라지는 그를 보며
그리다 만 얼굴이 더 많은 표정을 지녔음을 알게 된다
그는 불쑥불쑥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지독한 폭설이었다고
털썩 바닥에 쓰러져 온기를 청하다가도
다시 진흙투성이로 돌아와
유리창을 부수며 소리친다
“왜 당신은 행복한 생각을 할 줄 모릅니까!”
절벽이라는 말 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
물에 잠긴 계단은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한다는 뜻인지
내가 궁금한 것은 가시권 밖의 안부
그는 나를 대신해 극지로 떠나고
나는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그다음 장면을 상상한다
단 한권의 책이 갖고 싶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밤
나는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 그네를 타고
일초에 하나씩
새로운 옆을 만든다
파트너
너의 머리를 잠시 빌리기로 하자
개에게는 개의 머리가 필요하고 물고기에게는 물고기의 머리가 필요하듯이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오더라도 놀라지 않기로 하자
정면을 보는 것과 정면으로 보는 것
거울은 파편으로 대항한다
잠에서 깨어나면 어김없이 멀리 와 있어서
나는 종종 나무토막을 곁에 두지만
우리가 필체와 그림자를 공유한다면
절반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겠지
몸을 벗듯이 색색의 모래들이 흘러내리는 벽
그렇게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나의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을 가려보기도 하는
왼쪽으로 세 번째 사람과 오른쪽으로 세 번째 사람
손목과 우산을 합쳐 하나의 이름을 완성한다
나란히 빗속을 걸어간다
최대한의 열매로 최소한의 벼랑을 떠날 때까지
몽유 산책
두 발은 서랍에 넣어두고 멀고 먼 담장 위를 걷고 있어
손을 뻗으면 구름이 만져지고 운이 좋으면
날아가던 새의 목을 쥐어볼 수도 있지
귀퉁이가 찢긴 아침
죽은 척하던 아이들은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이따금씩 커다란 나무를 생각해
가지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불이 되어 일제히 날아오르고
절벽 위에서 동전 같은 아이들이 쏟아져나올 때
불현듯 돌아보면
흩어지는 것이 있다
거의 사라진 사람이 있다
땅속에 박힌 기차들
시간의 벽 너머로 달려가는
귀는 흘러내릴 때 얼마나 투명한 소리를 내는 것일까
나는 물고기들로 가득한
어항을 뒤집어쓴 채
—시집『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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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 1986년 경기 성남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2012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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