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귀신 (외 2편)
최금진
사랑도 없이 귀신이 되어가는 세월
시를 쓰기엔 인생이 너무 짧은 건 아닐까
변명을 횃불처럼 들고 찾아가는 산 82-5번지 모래 사원
염주를 주렁주렁 목에 걸고 있는 개미귀신이란 놈은
시체애호증이 있어서
집 가까운 곳에 마른 피육을 쌓아놓는다
침침한 눈으로 머리카락을 골라내듯 언어를 골라내기엔
너무 늦은 저녁, 신경쇠약으로 잔뜩 찡그린 얼굴로
어제 먹다 남은 말을 마저 먹는다, 아득바득
시를 쓰기엔 인생은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수도복을 입은 개미귀신들이 미사라도 보는 걸까
모래 속에 몸을 납작 엎드린 채 울고 있다
부스스, 내 손에서 사라지는 고운 모래의 언어를 만져본다
시를 쓰기엔 너무 캄캄한 모래 구덩이에서
죽은 비유들을 해골처럼 주렁주렁 꿰어 목에 걸고
그중 입맛에 맞을 것 같은 시 한줄을 맛보다가
퉤, 하고 뱉어내는, 당최 입맛이 없는 개미귀신 한마리
폐업신고라도 해야 할까
새들은 강릉에 가서 죽다
나의 생일엔 예쁜 창녀를 선물해줬으면 좋겠다
커다란 달 모양의 귀고리를 한 여자, 달에서 온 여자
캄캄한 것이 유일한 재능인 여자, 나를 죽여줄 수 있을 것 같은 여자
꽃보다 텔레비전을 볼 때 겨우 웃는 여자
생일 축하해요, 나를 혓바닥으로 꺼주는 여자
눈 내리는 강릉에 가고 싶다고, 깡통에 모아둔 게 이십만원이라고
몸무게가 영에 가까우면 좋겠다고, 어차피 천국에 못 가지만
눈 내리는 겨울에 대관령 자작나무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뼈다귀만 남은 산맥이 허연 입김처럼 눈발을 날릴 때
산새들이 날아가고, 덧없이 왜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이유조차 날아가고
창녀가 되기 위해 태어난 여자는 없으니
누구나 늙으면 돌아갈 곳은 보건소와 원룸과 무덤뿐
첫번째는 누군가의 아내였고, 두번째는 어떤 아이의 엄마였다고
일이 끝나도 마중 나오는 사람은 없고
여자의 이름도 그때그때 달라서 오늘은 왼쪽, 내일은 오른쪽
치킨을 좋아하나요, 나는 수면제를 좋아해요
비행사와 결혼할 거야, 이 무서운 속도, 지구의 자전이 무섭지 않게
가끔은 거리에서도 속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여자
변기 위에 앉아 있으면, 세상에 혼자 남겨진 두려움
지옥이 있으면 좋겠어요, 모두 울고 있거나 벗고 있을 테니까
나의 생일에 배달된 예쁜 창녀
강릉, 어느 눈 내리는 항구에서 이제 막 돌아온 배들을 다시 보내며
생일 축하해요, 내 살아온 시간을 조용히 불어서 꺼주는 여자
피뢰침
너는 고독하다, 너는 세상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벌 받는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꼬챙이처럼 마른 네 뼈다귀 아래에 집을 짓고 산다
개미 알처럼 하얗고 통통한 인간들이 너를 건물 관리소장쯤으로 생각한다
너는 강철을 아비로 두었지만 고작 마구간 같은 아파트 옥상 위에서 태어났다
번개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바닥에 내팽개치는 무용담 따윈 네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
비와 바람과 폭설 속을 맨몸으로 뚫고 지나가는 것
분노하고 주먹을 날리는 것, 노예가 아니지만
너는 그렇게 콘크리트에 탯줄을 묻고 세상을 내려다본다
폐지 줍는 노인은 폐지 한장 때문에 악랄하고
갑부는 뜰 안에 심어놓은 쥐똥나무 한그루 때문에 악랄하다
직설적으로 말해도 악랄하고, 비유적으로 말해도 악랄하고
달래도, 타일러도, 참아도, 입을 다물어도 저들은 교묘하게 악랄하다
우산을 든 악랄함과 우산이 없는 악랄함이 지하 커피숍에서
쏟아지는 폭우와 천둥을 악랄하게 불평한다
지독하게, 야무지게, 지랄맞게 불평한다
가운뎃손가락을 세워, Fuck you!
엿이나 먹고 떨어지라고, 하늘 꼭대기까지, 凸凸, 똥침!
창자가 터질 것이다, 뇌가 파열될 것이다
항문이 구워질 것이다, 염통이 구워질 것이다
밑바닥을 배우게 될 것이다
너는 접신하는 무당처럼 눈을 감는다
선 채로 못 박힌다
번쩍,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올 테면 와라!
와라!
와!
시집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창비, 2014)
최금진 / 1970년 충북 제천 출생. 2001년 ‘창비’ 신인시인상에 당선. 시집『새들의 역사』 『황금을 찾아서』『사랑도 없이 개미귀신』, 산문집 『나무 위에 새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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