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커서 (외 2편)
김현서
나는 커서 눈 밑의 반점
나는 커서 선물 상자
나는 커서 빨강 머리 소녀
나는 커서 잠이 깼을 때
나는 커서 죽은 지 6년 된 굴참나무
나는 커서 밑동에서 자라난 독버섯
나는 커서 방문을 열고 나갔지
나는 커서 깜빡거리는 별똥별
나는 커서 피아노
나는 커서 외발 당나귀와 길을 걸었지
나는 커서 눈을 감고 생각했지
나는 커서 까만 털에 붙어사는 이상한 벌레
나는 커서 초가 꽂혀 있는 조그만 케이크
나는 커서 천 번도 넘게 맞춰본 퍼즐
나는 커서 참 재미있었지
나는 커서 알게 되었지
나는 커서 사라진 토끼
화요일 오후
내 스웨터를 걸친 그림자가
조용히 매장을 돌고 있다
라일락 향기처럼
그가 남긴 흔적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팝콘의 고소한 냄새 숨소리 스트라이프 무늬 카페모카
그에게 서서히 중독되어간다
쇼윈도 너머로
나 같은 마네킹이 휘청거리며 걷고 있다
햇빛에 눈물이 탄다
탱고라고 불리는 상자
내가 상자를 열고 있을 때
한 아이가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
노란 머리핀을 닮은 꽃들이 죽은 아이 곁에 피어 있었고
햇빛은 말벌 떼처럼 윙윙거렸다
내가 상자 속의 상자를 열고 있을 때
아이가 놀던 숲이 일그러졌다 펴졌다
다시 찢어지는 원고지였고
꽃잎들이 흰 접시처럼 땅에 떨어져 깨졌고
호수 위로 물고기가 떠올랐다
내가 뒤죽박죽된 상자 속으로 들어갈 때
내가 아이의 옷과 사진첩의 먼지를 털고 있을 때
밤이 오고 개미 떼처럼 어둠이 몰려오고
폭우가 쏟아졌다
폭우는 사자의 갈기를 달고
성난 발자국을 남기며 지붕에서 지붕으로 뛰어다녔다
내가 상자 속에서 울고 있을 때
내가 냉수로 입속의 피와 남은 기억을 헹궈낼 때
상자 속에서 아기의 마른 울음이 들리고 황토물이 쏟아졌다
나는 액자를 깨뜨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오래도록
황토와 물과 소리가 분리되기를 기다렸다
—시집『나는 커서』(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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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서 / 1968년 강원 홍천 출생.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6년 《현대시사상》에 시로 등단. 200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코르셋을 입은 거울』2006,『나는 커서』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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