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외 2편)
박시하
차가운 유리병 속에서
내 취미는 영원히 무릎을 꿇는 것
슬퍼지기 위해서 이별하는 연인들처럼
증거도 없이 믿었다
“너는 슬픈 시를 쓰는구나.
슬픔이 시가 되었으니 안 슬퍼야 할 텐데.
시가 된 슬픔은 어느 다른 나라로
잠시 여행을 간 거야.
어느 날 건강히 다시 돌아올 거란다.”
답장을 보내는 대신
점점 얕아지는 강물 위에서
푸른 배의 꿈을 꾸었다
슬픔을 믿을 수는 있었지만
어떤 기도가 입술을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먼 강변에 있는 사람에게 입술을 떼어 보냈다
입술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유리병은 너무 뜨거웠다
여름의 주검
한 주검을 통해 여름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리 울음소리만큼 분명하지만 다시는 볼 수 없고 기억할 수도 없는 유일한 여름이었습니다 단 한 번의 꿈으로 이상한 희망을 가진 것입니다 노란 뱀이 벗어놓은 허물 같은 반투명한 사실에 대한 그 여름에 세계는 저녁의 거울처럼 두렵…
한 주검을 통해
여름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리 울음소리만큼 분명하지만
다시는 볼 수 없고
기억할 수도 없는
유일한 여름이었습니다
단 한 번의 꿈으로
이상한 희망을 가진 것입니다
노란 뱀이 벗어놓은 허물 같은
반투명한 사실에 대한
그 여름에 세계는
저녁의 거울처럼 두렵고
훌륭한 죽음이 되어갔습니다
콜 니드라이의 안경
나는 작은 걸음을 걸어서
컵 위에, 냉장고 위에 안경을 놓는다
그럴 때 안경의 여행은 길다
콜 니드라이 나무 위에도
나는 안경을 놓는다
나의 죽은,
죽어서 살아 있던 나무
안경은 보지 않고 보인다
까만 아기 양처럼
온순하게 자리에 놓여 있다
누군가 내게 안경을 쓰라고 하지만
그건 안경을 보라는 말일까?
나무는 안경을 쓰고 무엇을 볼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안경에 비친 눈물을 본다
죽은 나무의 눈빛이
내게 들어와
그와 눈을 맞추고
살결에 입을 맞춘다
나무의 여행은 오래되었고
그 숨결은 거칠다
누군가 그를 통해 나를 본다면
울고 있구나
햇빛이 너를 통과해서
웃고 있구나
죽은 나무에게 숨을 얹는다
그가 나보다 더 먼 여행을 할 것이기에
언젠가 그의 날에
그는 내게 걸어와 안경을 건네겠지
우주처럼
빛나는 안경을
살아 있는 그림자를 나는 볼 것이다
그 사랑을
사라지는 빛은 노란색이고
그림자는 검고 검다
—시집『우리의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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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하 / 1972년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졸업. 2008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눈사람의 사회』『우리의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 산문집 『지하철 독서 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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