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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원희 시집 『달과 통신하다』- 달과 통신하다 외 1편

문근영 2018. 12. 20. 02:27

달과 통신하다 (외 1편)

 

   이원희

 

 

 

창밖을 보고 있으면

모니터 화면을 보고 있는 듯 나는 밖에 있고

저녁이 창문 넓이만큼의 공간에서 움직이고 있다

낮과 밤의 경계를 창백한 얼굴로 서성거리던 달

23시 창안으로 눈길을 준다 벤자민 잎을 빛내며

거실 깊숙한 지점을 통과하는 저

빛의 입자에 실어 보내는 파동, 달과 접속한

그대 마음의 울림일까 창문을 열어 로그인한다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문자들

구름이 지나가는 소리였다가 낙엽을 태우는 냄새였다가

세상 일을 다 아는 사람의 얼굴 표정 같은

묘한 슬픔을 화면에 주사하는 이 편지를

오도송 같은 이 빛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주파수를 맞추며 암호를 푸는 동안

내 손등을 어루만지며 몸 안으로 들어오는 달

몸속 미세한 광케이블을 따라

허브 잎을 입안에 넣은 것처럼

온몸으로 퍼져 우주 밖으로 빨려간다

 

 

 

능소화

 

 

 

담장 안팎을 끌고 당겨 하나의 풍경을 만드는 능소화

금간 담장에 걸터앉아 갈라진 틈을 봉합하고 있다

한때 저 담장의 몸이었던 적 있었다

삶과 소통하지 못하고 벽으로 서서

근심으로 금 그어지던 몸

견딘 것들과 견뎌야할 것들 사이

살아온 방식과 살아갈 방식 사이

바람직한 세계와 나 사이

느끼지 못한 틈새의 거리지만 비애 쪽으로 넘어지다

간절함으로 곧추세우며 놓았다 붙잡은

생사生死 거리만큼의 틈으로 금 그어졌다

나를 꿈꾸게 하는 것은 저 꽃이었다

어슬녘에 걸터앉아 한 송이 피워 열 송이 피워

수백 송이로 담장과 하나 되어 경계를 지우는 능소화

구름도 연연하던 시간을 포용하며

풍경을 아우르고 있다

 

 

                      —시집『달과 통신하다』(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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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희 / 서울 출생. 동국대학교 전자계산학과 졸업. 2001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 시집『사랑, 그 침묵』『달과 통신하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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