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이불 / 유병록

문근영 2018. 3. 17. 10:08

이불

 

   유병록

 

 

 

 

방 한쪽에 코끼리 한 마리가 모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아무 말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위로도 타이름도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없다는 듯이, 널따란 귀로 얼굴을 가리고

 

여기는 이제 네 집이 아니라고, 그만 일어나 저 문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나는 재촉하지 못하고

 

이불처럼 커다란 귀를 덮고

코끼리는 잠을 잤다 방을 어지럽히거나 물건을 부수는 일도 없이, 간직한 이야기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듯이

 

내모는 일은 어렵겠구나 마음먹고 들여다보지 않은 며칠

 

너는 떠났다

광목 이불 같은 귀를 베어서 머리를 두고 눕던 자리에 곱게 개어놓고

 

나는 그것을 펼쳐서 덮지는 못하고 가만히 베고 누워 우리 함께 이불을 빨던 여름날을 생각했다 이제 온기라고는 없는 서러운 바닥에서

 

 

                       —《현대시학》201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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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록 / 1982년 충북 옥천 출생. 2010년〈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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