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나르키소스 머리카락 / 박현솔

문근영 2018. 3. 17. 10:07

나르키소스 머리카락

 

  박현솔

 

 

 

 

바람을 타고 온 머리카락이 팔에 휘감긴다.

때로 누군가의 영혼이, 그림자가 들러붙기도 한다.

지난 밤 불면 속에서 쥐어뜯은 머리카락, 베개 밑에

바닥 사이에, 창틈에 끼어 기억을 흐리게 한다.

길을 서성거리는 순간 내게 들러붙는다.

지난 생인가, 다가올 생인가, 시간의 틈새에

흘러든 말라비틀어진 열망은

실뿌리의 시간을 살아가는 또 다른 흔적들이

자석처럼 수많은 머리카락을 매달고

거리를 쏘다니거나 상점들을 헤매다 돌아올 때

누구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청춘을 들끓게 했던 것들 모두 벗어놓고

반성과 후회의 거센 물줄기를 맞는다.

물의 질타 속에서 방언처럼 터져 나온 머리카락들

허공에서 바닥으로 나뒹굴며 지들끼리 뭉친다.

지난 시간의 어떤 것들도 몸에 남지 않고

물길이 내어준 어두운 주름 속으로 내려간다.

새 수건에 붙어있던 머리카락이

익숙하거나 낯선 숙주에게로 들러붙는다.

나이거나 내가 아닌 것이 지금의 나를 가장한다.

 

 

 

                        —《미네르바》2015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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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솔/ 1971년 제주 출생. 본명 박미경. 아주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1999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1년 〈현대시〉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달의 영토』『해바라기 신화』.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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