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기
정병근
계사 문을 열자 소리와 열기가 확 끼쳐온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닭들이 오글거리고 있다
허둥대면서 깜박이면서, 오오 여기가 어딘가
틀어놓은 클래식 음악은 창의적인 육질을 만든다고
개들이 컹컹컹컹컹컹컹 개다운 소리로 짖는다
반 평도 안 되는 각자의 철창 안에서
얼마나 휘돌았던지 바닥의 철근이 닳아서 하얗다
수돗가에는 쇠갈고리와 토치, 칼 들이 나동그라져 있고
기울어진 솥 안에는 붉은 물이 고여 있다
주인이 식육견 사육 허가증을 보여주며 로고스하게 웃는다
포개진 넙치들 위로 돔 농어 우럭 들이 어슬렁거린다
유리벽을 들이받았는지 입술이 뻘건 놈도 있다
옆 수족관에는 뱀장어들이 득실득실 사무치고 있다
이끼와 거품을 제거하는 친환경 특허 장비를 달았다고,
도마를 말끔히 닦은 남자가 발라낸 살을 또박또박 뜬다
요양병원 병실 안에
늙은 남자들이 눈을 번들거리고 있다
한참 살핀 후에 아버지 닮은 아버지를 발견한다
"세일 중이라네, 99만 원!" 한 노인이 실실 웃는다
불경기라고,
병원 외벽에 장례식장 현수막이 붙었다
—《시인수첩》201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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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근 / 1962년 경북 경주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88년 《불교문학》을 통해 등단. 2001년 《현대시학》에 「옻나무」 외 9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번개를 치다』『태양의 족보』.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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