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파산된 노래 / 김 안

문근영 2017. 10. 31. 12:42

파산된 노래

 

   김 안

 

 

 

우리는 정직하게 말해도 되겠지만,

종국엔 비겁하게 말을 고르겠지.

누군가는 시체를 숭배하며

시체뿐인 기억을 기념하고 기록하고

누군가는 기억 속에서

스스로를 지워 나가며 투쟁하듯,

누군가는 증언 앞에서 포악하게 침묵하고,

또 누군가는

겸손해지듯,

이 말의 노역들은 이처럼 쓸모없이

지독하게 비열한 모럴과 무한한 타락 사이에서

불행한 우연들로 집적된 필연들 사이에서

단 하나의

감정을 걸러내기를,

단 하나의

가치를 뽑아내기를 바라마지 않겠지만,

그러니 누군가는

종국엔 일상이 된 악들만이 가치가 된다고 하겠지만,

말이 우리를 비껴 나가면서 어긋나면서 가 닿는 가치가

민족중흥,

선진 대한민국,

조국의 미래 따위일 리는 없겠지만,

부끄러움은 자라나는데,

우리의 말은 아무런 괴로움 없는

스스로에게만 자명한 선들,

선의 역린.

그리하여 우리의 말이

종국엔 평범하고 고요한 무관심들이라면,

무관심의 전체주의라면,

이 노래는 어떻게 파산해야 할까,

어떻게 사라져야 할까,

기억이 사라지고

기억이 기록되지 않아 우리가 영영 사라질 때까지,

우리의 말이

우리로부터 끝끝내 항거할 때까지,

우리의 육체 속에 없던 말들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어휘들과

비참의 부력으로 떠서

우리 바깥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

삶이 없는 생자(生者)들 속에서.

 

 

                     —《현대시》201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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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 / 1977년 서울 출생. 2004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오빠생각』『미제레레』. 현재 월간《현대시》 편집장.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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