耳鳴
나희덕
새로운 배후가 생겼다
그들은 전화선 속에서 숨죽여 듣고 있다가
이따금 지직거린다, 부주의하게도
그는 엿들으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어쩌면 그는 아주 선량한 얼굴을 지녔을지 모른다
절제된 표정과 어투를 지닌 공무원처럼
경험이 풍부한 외교관처럼
이삿짐센터 직원이나 택배기사처럼
무심한 얼굴로 초인종을 눌렀는지도 모른다
문 뒤에 서 있는 투명인간들
주차장 입구에서 현관문 앞에서 복도와 계단에서
우연히 마주친 듯 지나는 낯선 얼굴들
개 한 마리가 다가와
마악 내려놓은 쓰레기봉지를 킁킁거리다 사라진다
그러나 배후는 배후답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어느 날 귓바퀴를 타고 들어와
잠복 중인 발소리
새로운 배후가 생긴 뒤로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귀가 운다
피 흘린다
풀벌레들이 낮밤을 가리지 않고 운다
한겨울에도 운다
끈질기게 끈질기게 고막을 파고든다
쉬잇, 그들이 복도를 지나고 있다
—시 전문 계간지《발견》2017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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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야생사과』『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시선집 『그녀에게』.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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