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이 작은 파도였을 때
김중일
어느 파도는 너무 일찍 밀려왔다.
어느 파도가 얼마나 일찍 왔는지, 일찍 올는지 알 수 없다.
일찍 온 파도를 뒤집어 작은 돛배처럼 도로 바다로 떠밀어보기도 했지만,
일찍 온 파도는 내 발목에 묶여 있고, 내 다리는 무겁게 젖어있다.
내 다리에 그림자처럼, 지구 한 바퀴만큼 긴 파도가 끌린다.
특히 저 어린 파도는 유독 일찍 왔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 산이, 아이 발등처럼 작은 너울이었을 때, 아이가 읽다가 엎어놓은 책이었을 때, 책을 잡던 작은 손등이었을 때, 그 손등에 입맞춤하던 엄마의 입술이었을 때, 콧등이었을 때, 솟은 젖가슴과 부푼 배였을 때, 기포였을 때, 티끌이었을 때, 수많은 키스이고 입김이고 손길이었을 때, 처음의 고백이었을 때, 속삭임과 휘파람이었을 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우연이었을 때, 스침이었을 때, 옷깃 같은 파도였을 때, 한 아이 겨우 덮을 작은 이불 같은 흰 파도였을 때
너무 일찍 밀려온 파도가 겹겹이 쌓여 이 산이 되기 전,
울고 있는 한 사람을 간신히 건져 온 파도를, 파도와 파도를 천 일 넘게 덧대어 만든 이 산 한 척을 바다에 띄워, 오늘도 밀려오는 사람들 마중가야 할 텐데.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 산이, 사람 키만한 작은 파도였을 때
파도처럼 솟은 무덤이, 무덤처럼 솟은 파도로 이 산까지 밀려올 때
무덤처럼 솟은 파도가, 파도처럼 솟은 무덤으로 쌓이고 쌓여,
해일처럼 치솟은 산비탈에 깊이 박힌 돌을 빼내듯, 움직이지 않는 이마와 어깨와 손등을 부여잡고 흔들 때
땅속에 평생 박혀 차갑게 젖은 돌 같은, 바다에 박힌 파도를 붙잡아 열어젖힐 때
파도 한 너울이, 한 사람이 매달린 벼랑처럼 밀려와
쉼 없이 내 눈가에 차오르고 있다.
—《문장웹진》2017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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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일 / 1977년 서울 출생.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시집 『국경꽃집』『아무튼 씨 미안해요』『내가 살아갈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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